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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4. 2024

까치소리와 토정비결


집 가까이 산을 두고 사는 나는 자주 까치소리를 듣는다. 새 아침을 열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소리는 청량히 맑아서 귀를 모으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새라 한결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백과 흑이 깔끔히 조화 이룬 몸매에다 상쾌한 목청, 거기다 해충을 먹이로 하는 까치는 거의 국조 대우를 받고 있다.

 

잡다한 일상의 편편 속에서 문득문득 듣게 되는 까치소리.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까치소리의 향방을 쫓는다. 어느 땐 저만큼 물러선 언덕의 미루나무에서, 가끔은 앞 집 TV 안테나에서 꼬리를 까닥 대며 예의 그 맑고 높은 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까치.

 

까치소리는 들을 때마다 매번 무언가에 대한 은근한 기대와 달착지근한 감회에 젖게 된다. 더구나 아침녘에 그 소리를 듣는다면 그 하루는 기꺼운 기다림으로 들뜨기 일쑤다. 미신이든 속설이든 어떠랴. 까치소리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짐에야.

 

하긴 나는 대체로 미신 따위에 약하다. 그래서 가리는 게 많은 편이다. 이사 날짜와 위치 등을 뽑아 보며 부질없는 짓이라 여기다가도 한마디로 좋은 게 좋지 않겠나 싶다. 굳이 나쁘다는 걸 억하심정으로 우겨 역행할 만큼한 용기도 담도 없는 셈이다. 절에 다닌 이후 미신에 어깨 기대는 일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사실 미신이나 속설에는 전혀 이치에 합당치 않은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밤중에 손톱 깎으면 안 되고,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면 나쁘고. 밤에 피리를 불면 뱀이 들어온다는 둥. 그 외에도 저녁 거미를 보면 재수 없다고 잡아 버리고 아침에 내려오는 거미는 좋다며 반기는 것도 그렇다. 사실 방안에 있던 거미가 돌아다니는 건 밤이건 아침이건 거미 맘 아니겠는가. 구태여 거기에 의미를 붙이고 재수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우습다.

 

그러나 미신이라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는 것 중에는 그래도 건질만한 내용들이 있다.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신빙성 있는 것들도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미신을 장려 내지 권장하는 건 아니다. 벽에 못 하나 치면서도 방위 보고 일진 보는 극성파에다 심지어 사주팔자를 좋은 시각에 맞추기 위해 미리 뽑은 사주에 맞춰 길일 길 시에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한다는 한심파도 있는 세상이니.

 

하지만 밤에 불장난 치면 오줌 싼다는 얘긴 위험한 불장난을 못 하게 하기 위해 창피스러운 오줌싸개와 연관시킨 재치가 일품 아닌가. 짭짭거리며 소리 내 밥을 먹으면 복이 나간다는 말도 식사예절을 은연중에 가르치는 것이고.

 

아직도 나는 아이들 이를 갈 때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진다. 그리곤 ‘까치야 까치야, 헌 이 가져가고 튼튼하고 예쁜 새 이 다오’ 하며 아이와 함께 리듬까지 섞인 기원을 보낸다. 그것은 어쩌면 고르고 건강한 이를 갖기 위한 자기 최면의 한 방법일 것이다. 얼마 전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송곳니가 흔들리자 막내는 걱정스레 말했다. 내 이빨 던질 지붕이 없잖아....

 

내친김에 좀 창피한 얘기도 털자. 왠지 나는 돈벌레라는, 발이 쉰 개쯤 달린 벌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벌레 생김새야 지네를 닮아 징그러운 데도 집 밖으로 몰아내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갑이 부품해진 듯하니 흐뭇할밖에. 마루에 기어가는 돈벌레를 보면 일부러 애들 아빠까지 부른다. 이러한 속물근성에 웃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무욕으로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인간의 끝없는 갈구가 없었다면 아마 역사마저 정체되었을지 모를 일이고.

 

올해, 신년 벽두에 토정비결이라는 걸 보았다. 신년 초라면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성실히 실천해 나갈 자세 가다듬을 시기. 헌데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가 재미 반 기대 반으로 슬쩍 본 토정비결을 종내는 사들고 나왔다. 왜냐하면 구구절절 너무 좋은 내용뿐이어서.

 

─용이 큰 못에 잠기니 작은 것 쌓아 큰 것 이루도다. 달 아래서 거문고 타며 한가히 높은 당(堂)에 앉다. 봄에 꽃다움을 찾다가 문득 꽃 핌을 본다‥‥‥.

 

과연 기막힌 문장들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단언하건대 아직까지 그 이상 희망적인 내용의 명문장은 본 바 없다. 토정비결을 썼다는 이지함 선생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안 맞은들 어떠랴. 일 년 내내 읽고 또 읽으며 두고두고 혼자 흐뭇해하면 됐지.

 

하긴 너무 좋은 토정비결 치고 맞는 것 못 봤다 한다. 사실 여기 나와 있듯이 매양 좋다면 아마 일 년에도 몇 번씩 행복에 겨워 까무러치지 않겠나. 논리적이고 명징한 결론을 낼 줄 아는 서양식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이지만 동양철학의 오묘한 우주관도 수긍하는 우리가 아니던가.

 

이래저래 올해는 날마다 까치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1986-


-뱀꼬리-



 '봄빛에 버드나무가 한결 푸르다.'

아침나절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한 다음 블로그를 열었다.

연초답게 한 블로거의 포스팅에 올해 토정비결이 보이기에 흥미가 당겨 들어갔다.

생년월일을 넣고 클릭, 한해 총 운세와 월별 운이 나오는데 대번 첫머리에 맘을 휘어잡는 구절이 보인다.

좋을시고~버드나무가 봄빛에 한결 푸르르나니...

이어서~ 강한 기운에 힘입어 본인 스스로 주도적으로 정점을 향해.... 그 대목만으로 충분하다.

행복은 이미 예약되었다. 프하핳~

오래전, 그러니까 1986년 봄에 쓴  글 <까치소리와 토정비결>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해 오월에 실제로 조병화 선생이 주관하던 <문학정신> 지의 추천과 동시에 부산문화방송 신춘문예로 데뷔를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 문득 꽃 핌을 본다....' 던 토정비결 구절대로 그해 연달아 기쁜 일을 접했던 셈이다.

주역의 음양설을 기초로 한 術書인 토정비결이다.

점술에 의지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금기시하는 행위이다.

야훼 이레! 주께서 내 앞길을 이미 예비해 놓으셨거늘, 하여 모든 걸 그분께 의탁하고 그분만 바라보고 살면 됨에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 때문에 존재는 나약해지고 종종 현실의 벽 앞에서 한계를 절감한다.

특히 지난 몇 해, 역병에 송두리째 저당 잡힌 미증유의 사태에 처해지고 나자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심리적 위로와 위안이라는 안정감을 얻고 나아가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에 꿰어 맞추려는 심사가 작동하는 걸 나무랄 수도 없는 일.

물론 사주팔자는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는 데 재료가 될 뿐이며 그에 앞서 내 능력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실이다.

해서... 단지 기대 심리와 놀이적 요소가 복합된 풍습의 하나로 재미 삼아 보는 토정비결,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는다.

그러하더라도 세시풍속으로 정착되다시피 한 토정비결을 한마디로 무질러 미신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근거는 약하더라도 왠지 허전하다.

꾸준히 인구에 회자되는 데는, 긴 세월에 걸쳐 나름 인정되고 검증된 면도 있긴 있는 것이니까.

통계학적 자료나 사주의 기본 원리인 음양과 오행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오랜 관찰의 결과물.


그를 통해 생활의 지혜를 쌓고 겸손한 삶을 위한 지침의 하나로 참조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는지.....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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