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홉 시 미사는 리처드 신부님이 집전하셨다.
리처드 신부님은 은퇴 신부님이다.
삼 년 전 처음 그분을 뵐 적에는 상노인 중의 상노인네이셨다.
백인들은 노쇠현상이 빨리 오는지 칠순 초반임에도 어깨가 약간 구부정하게 숙여졌다.
주춤주춤 걷는 걸음걸이가 여차하면 앞으로 쓰러질 듯 불안스러웠다.
초기 치매노인처럼 말도 어눌했으며 장시간 서있지도 못했다.
생기라고는 거의 없이 안색은 파리하니 목까지 주름만 자글거렸다.
천진스러운 미소가 스민 얼굴에 검버섯도 없이 피부는 맑았지만 갈데없는 상노인네.
누울 자리 찾는 영락없이 너싱홈 환자 같았다.
요즘엔 회춘(불경함 용서하소서~)이라도 하신 듯 아주 강건하시고 자세 꼿꼿해졌다.
일주일에 두서너 번은 미사 집전도 맡으시고 취미 삼아 주로 정원 손질을 하신다.
우리 성당에 오시기 전.
은퇴 사제들이 모여 지내는 숲속의 집에서 그야말로 고요하게 생활하셨다 한다.
연이 닿은 본당 주임신부님이 모셔와서 이곳 사제관에서 함께 기거하신다.
이 성당에는 부설학교가 딸려있다.
여섯 살 꼬맹이부터 12학년까지 성당 내 한 울타리 안에서 공부하고 운동도 한다.
교실에서는 낭랑한 노랫소리, 체육관에서는 힘찬 함성이 들린다.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걸 바라보며 노사제는 점점 기력을 회복해 가셨다.
역할도 주어졌다.
평생을 제대에 서셨던 분이니 미사 집전만큼 생명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역이 어디 있으랴.
소일거리도 생겼다.
햇볕을 쬐며 성당 주변의 풀을 뽑고 앞뒤 정원을 가꾸신다.
리처드 신부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세월이 거꾸로 가는 듯하다.
기운찬 활기를 되찾고 표정도 환해지셨다.
유머가 풍부해져서 강론 중에 와아~웃음꽃도 피어나게 만든다.
우리 성당은 평일 미사 전례는 한 번 뿐이지만 주일 미사는 넉 대를 올린다.
주임신부님과 보좌신부님이 번갈아 미사를 집전하지만 휴가 혹은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울 경우.
주일날 한 분이 혼자서 미사 집전을 하려면 종일 쉴 새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해진 시각의 미사 전례를 거를 수도 없다.
부제가 네 분이 있으나 그분들이 미사를 집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리처드 신부님이 수시로 한 번씩 도와주셔서 무리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주일마다 강행군을 하시던 두 분 신부님도 어느 정도 여유시간이 생겼다.
한국 살 적에 주변에서 정년퇴직하신 분들을 자주 보아왔다.
명퇴가 아니면 육십 나이 즈음해서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퇴직 후 한동안은 넉넉한 시간여유 만끽하며 해외여행도 다니고 알맞은 취미활동도 한다.
벼르던 매일 산행도 다니며 아~좋다, 좋다를 외치나 그게 여섯 달을 못 넘긴다.
날이면 날마다 판판 놀기도 지겹다며 종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규칙적인 시간 생활하던 때, 맡겨진 업무가 있던 시절이 정말로 사는 것 같았다고.
바로 그게 행복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다 한 일 년쯤 지나 만나면 그새 폭삭 늙어 하얀 노인네가 되어버렸다.
Well-being과 더불어 이젠 나이를 잘 먹는 Well-aging까지가 행복을 위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이라 한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나잇값 하며 늙는 것을 웰에이징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웰에이징은 노화를 거스르기보다는 현명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개념이다.
노화에 따른 신체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심신 공히 아름답게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이겠다.
그리하여 Well-Dying, 회한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겠는가.
Well-aging이 준비 안 되거나 훈련 안 된 노후, 하는 일이 없으니 소화기능도 시원치 않고 잠도 못 이룬다.
경로당, 노인대학을 찾아다니나 오히려 거기서 노쇠 증상만 전염되는 듯 더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며 꺼린다.
있는 건 시간뿐, 흔전만전 지천으로 남아도는 시간이 겁나기 시작한다.
차츰 자기 관리가 안 된다.
성격도 외골수로 이상해진다.
쩌렁하게 운동장을 울리던 목소리도 맥이 빠지고 강의실 휘어잡던 카리스마도 빛바래졌다.
청장도, 지검장도, 교장도, 장군도, 세관장도, 이사장도 은퇴 후엔 별 수 없는 노인네다.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 있으나마나 한 잉여인간으로 자리매김되기 십상이다.
하염없는 추락이 기다릴 뿐이다.
수시로 울려대던 전화벨, 뻔질나게 찾아오던 발길도 끊긴다.
희미해져 가는 존재감.
그렇게 잊힌 사람이 되어가며 섬처럼 고립되는 것도 잠깐 사이다.
미구에 예고도 없이 부고장이 날아온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여하히 가꿀 것인지 퇴직 전에 미리미리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
노후문제는 경제적 측면만이 심각한 게 아니다.
물론 건강은 필수조건이다.
그다음은 내가 즐겨 몰두하며 시간 바칠 수 있는 보람있고 가치 있는 역할 찾기다.
취미활동을 보다 전문 단계로 확충시켜 나가거나, 자신 있는 분야에서 전공 살려 재능봉사를 하거나.
무언가 자신에게 최적화된 일을 찾되 과거에 연연함 없이, 그리하여 라떼 소리 듣지 않도록 처신하기.
"오늘을 마치 당신이 맞는 최초의 날인 동시에 당신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아가라" 하우프트만의 말이다.
매일매일을 내 삶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처럼 산다면
하루를 최대한의 성실과 정열과 감격으로 진지하고 절실하게 살지 않을까.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야말로 열어보지 않은 선물이다.
지금 이대로에 자족하며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행복하기.
현재를 즐기되 늘 새로운 마음으로 시간관리 잘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적절한 역할을 가짐으로써 사회와의 끈을 놓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삶의 긴장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것.
어떻게 노년을 맞을 것인가, 선택도 결정도 온전히 자기 몫이다.
일요일에 뵌 리처드 신부님 모습이 한차례 죽비 되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줬다.
그래~ 안수 주시듯 노사제께서 정수리에 얼음물을 부어 영혼 일깨워주셨구나.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