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 연어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회귀본능이 내재한다.
젊어서부터 외국에 나와 산 사람이라면 미국 사회에서도 일정 정도 수준에 이르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예가 적잖다.
따라서 대부분 경제적으로 재력이 넉넉한 이들이다.
그런만치 사회생활을 하는데 미국에서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살아왔다.
친구도 다양하고 언어 능통하고 어떤 서양 음식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그런 이들이 나이 들어 노년기를 맞으면서 은퇴 후 삶의 청사진 중 역이민이라는 옵션 하나를 추가하게 됐다.
더구나 소울 푸드란 말이 있듯 나이 지긋해질수록 본능적으로 어릴 적 먹던 한국 음식을 몸이 찾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미국 내 한인타운을 전원주택보다 더 선호해 거주지로 삼고자 하는 은퇴자들이 는다는데 이유는 한국 식당과 한국 식품을 접하기 쉬워서란다.
외국에서의 교민 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하는 역이민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나부터도 그중 하나다.
원래 나야 식성부터 시작해 열에 아홉은 미국살이가 전혀 맞지 않는 부적격자에 속한다.
그럼에도 미국에 잘 적응해 살아왔고 주어진 환경을 내게 맞춰 나름 유쾌하게 지내왔기에 리턴을 특별히 고려해 본 적이 없다.
사막이나 오지에 데려다 놔도 그 틀에 맞춰 재미지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 묘하게 특별한 면이 있다고나 할까.
한 달간 한국 방문을 하러 왔다가 즉흥적인 성격대로 어느 날 갑작스레 생각잖은 역이민 결정을 하게 된 케이스가 나였다.
한국에서는 의외로 교민들의 역이민에 대한 정서는 부정적 측면이 농후해 기회주의자라느니 배신자라는 프레임까지 씌운다.
동시에 복수국적자라는 데 거부감 내지는 경계심을 갖는 주변인들도 적지 않다.
회색인, 아웃사이더란 꼬리표를 붙여두고 경원시하기도 한다.
모국을 외면하고 떠날 때는 언제고 국력이 신장되며 살만해지자 돌아온다는 둥, 역이민자를 대하는 눈초리가 곱잖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한국에 피해를 끼치기는커녕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간 벌어둔 돈을 쓰러 오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소비의 주체로서 오는 이들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국내 최고급 실버타운 주 고객이 재미교포들이라지 않던가.
만약 기본생활이 곤궁한 입장이라면 역이민은 감히 엄두도 못 낸다.
여러가지 사유로 역이민을 택한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육십 년대 간호사로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이 만든 남해 독일마을은 튼실하게 자리 잡혔고 경기도 고려인 마을도 거의 정착단계다.
이중 혹은 복수국적자, 부정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이중국적자 대신 복수국적자로 용어를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과 미국 이중 국적 외에도 한 사람이 다수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례도 있어 통상 복수국적자라 칭한다.
대한민국 국적법은 개인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국적 외에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한 규정을 국제 기류와 국익에 부합되는 경우에 한해 국적회복 허가를 받으면 복수국적이 인정됐다.
특히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목적으로 귀국한 65세 이상자에게는 복수국적이 허용됐던 것.
복수국적 허용에 따른 병역기피 등 부작용과 사회적 위화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와 관련된 규정을 보완했다고 한다.
분단국가로서 국방의 의무가 국민이 지켜야 할 4대 의무 중 하나인 우리나라다.
그걸 피하고자 편법을 이용해 얌체짓을 하다 귀국의 길이 막힌 가수 유승준의 케이스를 보나따나 국민 정서상 이를 허락지 않는다.
국민들 감정이 민감하게 부딪치는 곳이 병역 분야와 함께 교육 문제란 것은 조국 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복수 국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개인이 두 국가의 국적을 가지되 동시에 두 국가에 대해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다.
국적 개념은 1952년도 미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두 국가에서 국적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며 두 국가의 책임 역시 당연히 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동시에 일단은 신분상 양국 어디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고 본국으로 영구 귀국했을지라도 경우의 수가 생기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원위치할 수도 있다.
서울에 간 김에 다들 할머니가 된 외사촌과 이종사촌 동생들을 만났다.
바로 얼마 전에 메릴랜드에 사시는 98세의 이모님과 통화를 나눴는데 현선이가 한국으로 살러 갔다고 하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소식이었다.
현선이는 막내이모 딸로, 교민과 중매결혼을 해 미국에서 산 지가 올해로 꼭 사십 년이 되었다.
메릴랜드에서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며 듬직한 세 자녀를 두고 규모 큰 세탁소를 두 개나 운영하면서 탄탄한 살림을 살아온 그녀다.
오빠네 가족을 초청해 가까이에서 생활하니 외로울 리도 없고 수구초심이 든다거나 할 나이 아직은 아니다.
어느 면으로 봐도 역이민이란 전혀 고려해 볼 까닭이 없는 조건에다 성정이며 환경인지라, 나로선 너무도 뜻밖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곧바로 이모 막내딸인 효선이에게 전화를 해 그녀 언니 현선이 와도 연락이 닿았다.
셋째 이모 딸내미와 인천에 사는 외사촌도 불러 우리는 다음 날 그녀가 사는 서래마을에서 만났다.
나이 든 여자들의 수다에 질릴 법 해, 외가 쪽 오빠들과의 만남 자리는 뒤로 미뤘다.
대구탕과 곤드레 정식을 걸판지게 먹고 나서 자리를 바꿔가며 오랜만에 만난 우리라 이야기꽃 계속 피워냈다.
서해안 갯바람 이는 충청도 풍광 속에서 엮여진 여름방학이며 어릴 적 시시콜콜한 추억담들이 풀려나왔다.
외가 가계 종횡무진 훑으며 외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열 명이나 되는 외삼촌 이모들 순서 없이 소환해 냈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무수한 공통의 화제들.
언제든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다시 모여 날밤 새며 만리장성 쌓아보기로 하였다.
현선이가 사업체와 자녀들 다 놔두고 역이민을 감행한 데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은퇴를 앞둔 재작년부터 그들 부부는 역이민을 계획하고 주변 정리를 하며 착착 진행해 온 일이라 했다.
올 사월 초 한국으로 나와 남편과 함께 국적회복 신청 절차를 밟고 있는데 9개월이 소요될 거라고 하였다.
2019년 내가 그 신청을 할 당시만 해도 육 개월이면 모든 절차가 끝났는데 확실히 신청자가 늘긴 는 모양.
이 절차를 밟는 동안은 한국에 거주해야 하므로 그녀는 복수국적이 확정되는 겨울에나 메릴랜드 집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평소 그녀 가족은 주일은 물론이거니와 주중에도 교회일에 지극정성으로 매달렸다.
주일예배도 한 번이 아니라 오전과 오후, 자녀들 역시 열심이었다.
아이들은 사춘기 적에도 주일학교가 열리는 교회출석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들 가정엔 항상 은혜가 넘쳐나고 평강이 늘 함께 했다.
남편은 장로 직분을 맡아 오래 교회를 섬겨왔으며 그녀는 집사로 오롯이 교회 일에 봉사해 왔다.
그걸 알기에 내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 말이 "아니 니네가 한국으로 오면 니네 교회 살림은 누가 봐?"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에 그녀는 "맞아! 언니, 교회 일로 우린 한국에 왔어."라고 했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은퇴 후 귀국해 제천에서 개척교회를 이끈다는 말을 듣고 한국행 결심을 한 그들 부부.
아프리카 같은 데로 선교활동 나가는 것도 보람 있지만 그들은 한국으로 와서 목사님 도우며 농촌 선교를 하기로 작정했던 것.
세상에나 놀랍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어머나! 그런 경우도 있구나!
연신 느낌표만 연발로 터졌다.
내 신앙 수준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거사요 결단, 정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시 분명했지만 내 유추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대답을 그렇게 들었다.
수구초심이라는 보통의 역이민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이종네의 한국행을 우선은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