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월 22일은 절기상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다.
오죽 무더우면 그 단단한 염소 뿔도 녹는 대서라고 했을까.
얼음 동동 띄운 식혜가 생각나는 날이다.
해서 식혜를 만들기로 했다.
음식 솜씨는 별로지만 전부터 송편과 식혜는 자신있게 만드는 편으로, 특히 식혜는 전기밥솥이 나온 이후부턴 일이 번거롭지 않아 걸핏하면 했다.
식혜 만들기라면 이력이 붙어 눈 감고도 할 거 같고, 내 솜씨지만 맛도 제법 그럴싸하다,
오일장에서 깨끗해 보이는 엿기름과 찹쌀을 샀다.
필수 재료인 엿기름이 곧 식혜의 맛을 좌우하기에 잘 띄워진 엿기름을 구입해야 한다.
전통방식대로 발아시킨 엿기름,
통보리가 하얀 뿌리랑 파란 싹을 틔워낸 거친 엿기름이야말로 옳은 식혜 맛을 내준다.
엿기름을 큰 함지에 덜어놓은 다음 미리 물에 담가 서너 시간 불려둔다.
정수한 물에 두 시간 정도 담가뒀다가 부드럽게 엿기름이 퍼지면 손으로 조물조물 충분히 치대 준다.
뽀얗게 속이 우러난 엿기름을 체나 삼베 자루에 넣어 걸러낸다.
얌전스런 식혜를 원하면 앙금을 완전히 가라앉혀 맑은 윗물만 쓰면 된다.
감주에 가깝게 당도를 높이려면 가라앉히지 않은 뽀얀 물을 그대로 쓴다.
다만 상품화된 식혜에 익숙한 젊은 층 기호는 이 맛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어언 인공향료의 산뜻한 향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은 탓이다.
전통식으로 만든 식혜에선 맥아 내음이 난다며 고개를 젓는데 본래 식혜 맛은 바로 이 맛이다.
식혜 만들기가 번거롭던 전과 달리 전기밥솥이 식혜 만들기 일등공신이 된 요즘이다.
찹쌀을 정하게 씻어 서너 시간 물에 충분히 불려준다.
찹쌀로 고슬고슬 고두밥을 지어 뜨거운 밥솥에 엿기름 거른 물을 윗물만 따라 부은 다음 고루 저어 섞어준다.
엿기름 물에 밥이 잠겨있는 상태에서 전기밥솥을 보온 유지시켜 뭉근하게 예닐곱 시간 삭혀준다.
저 혼자 알아서 식혜를 삭히는 전용 큼직한 전기밥솥이 따로 있다(식구수가 적어서 평소엔 안 쓰는 큰솥).
밥솥을 보온상태로 유지시킨 채 여러 시간이 흐르면 밥알이 삭아서 위로 뜨기 시작한다.
밥알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이때 전기밥솥의 내용물을 들통에 옮겨 생강 몇 쪽 저며 넣은 다음 한소끔 팔팔 끓이며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낸다.
설탕을 넣어 원하는 만치의 당도 조절도 동시에 해준다.
식혜를 끓일 때는 잠시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 와르르 순식간에 넘치기 때문이다.
편하면 더 편한 걸 원하는 게 사람이다 보니 모든 면에 있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편리해지는 생활.
요샌 엿기름도 티백으로 나와 손쉽게 식혜를 만든다고 한다.
밥이 뜨거울 때 찬물과 티백을 넣고 삭히면 식혜가 된다니 간편하긴 하나 찜찜해서 사용치 않는다.
녹차조차 티백 사용을 해야 하는 상품은 마다하는 편인데, 아무리 식약처에서 무해하다 했을지라도.
별도의 거름망이나 면포가 필요 없어 아주 편리하겠지만 글쎄다.
티백은 주로 종이로 만들지만 플라스틱이 첨가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티백 홍차는 순수 종이로 만들어져 걸핏하면 터져 홍차 가루가 새어 나왔다.
근자엔 나일론처럼 질겨진 티백이라 터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플라스틱 소재인 폴리아마이드는 내구성 뛰어난 나일론 섬유 폴리에스테르를 만든다.
그 외 폴리프로필렌, 셀룰로스 고분자로 만들어진 티백에선 엄청난 숫자의 나노플라스틱 입자가 검출됐다.
미세플라스틱 겁난다는 건 다들 안다.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위험하다고 사계의 전문가들이 경고했고, 공기 중 미세 플라스틱이 호흡기를 통해 우리 몸에 들어온다 해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요즘이다.
크기가 5㎜ 이하인 플라스틱 조각을 뜻하는 미세플라스틱이 인체의 세포핵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잠재적 두려움이 너무도 크지 않은가.
패트병 사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플라스틱은 몸에 흡수돼도 변으로 배출된다고 했으나
근자인 2022년 네덜란드 성인을 대상으로 한 혈액검사를 통해 미세플라스틱이 핏속에서 관찰돼 경악시켰다.
결국은 가급적 PS, PT 제품이라면 사용을 최소화하는 게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선책이다.
밤새 아궁이 불을 조절해 가며 가마솥에 식혜 삭히던 시절은 전설이 되고 만 세월.
장독대에 올라앉은 식혜 자배기는 사락사락 내린 눈 덮어쓴 채 살얼음이 살푼졌었지...
사기 보시기에 식혜 찰랑거리게 떠 소반에 받쳐 들고 와서 예전처럼 엄마랑 마주 앉아 마실 수 있다면.
주말 기온이 32도를 넘는다는데 유리그릇에 얼음 동동 띄워 오실 수 없는 엄마 대신 벗에게라도 접대할까.
미국에서는 주로 손자가 좋아해서 식혜를 만들었다.
기질도 비슷하고 식성도 닮았다며 제 조카는 "여러모로 박 씨보다 구 씨 科에 가깝다"는 우스개 하던 딸내미.
그도 그럴 것이 집요한 면이며 깔끔 떨어대면서 탁 튕기는 성격에 푹 익은 신김치를 좋아하는 거까지 조손 간에 워낙 유사점이 많긴 많은 편이다.
손자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한국 방문한 날 따라 미국에 오더니 여기서 학교 다니겠다고 졸라, 제 부모들도 그 고집 어쩌지 못해 유학을 보냈다.
와서 처음 한동안은 팔을 뻗어 내 손을 깍지 껴 잡고서야 잠이 들곤 했는데 이젠 다 커서 대체군복무 중이다.
차게 식힌 식혜를 유리잔에 따라놓고 마실 생각은 안 하고 옛날 떠올리며 마냥 바라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