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등선, 나래 단 매미

by 무량화


이른 봄 매화부터 철따라 다양하게 꽃이 피는 공원이 거처 가까이 있다. 계류소리 시원하고 울창히 푸른 나무그늘이 좋아 여름철이면 더 자주 들르는 걸매생태공원이 그곳이다. 공원 초입 조경수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시작으로 길을 걷다 보면 요즘 여기저기서 매미소리를 듣게 된다. 폭염 따가와지며 그새 매미소리도 짱짱하게 익었다, 한여름을 노래하는 매미소리가 여간 차지지 않다. 숫제 귓가가 쟁쟁 울린다. 제한된 짧은 한살이 마무리하기 전, 구애를 위해 목청껏 짝을 부르며 성하의 여름을 소리로 장악하고 있는 매미가 모과나무에 착 달라붙어있다.



모과나무는 수형과 외피가 독특해서 눈길을 끄는 나무다. 외기둥으로 치솟은 몸체가 아니라 땅바닥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올라와 무리 이뤘다. 그마저 몽둥발이로 전지 시켜 겨우내 추상화로 섰더니 봄이 되자 새잎 피면서 줄기에서 퍼즐 쪽 같은 껍질이 떨어져 나왔다. 잎 무성해진 여름 모과나무 표피는 군복처럼 얼룩무늬를 이룬 데다 살결은 아주 매끈하다. 그래서일까. 모과나무 줄기에 말라붙은 매미 껍질들이 다수 시선에 들어왔다. 곁에 다가가보니 여기저기 매미 허물이 붙어있었는데 아래짬으로 내려갈수록 더 많았다. 굼벵이가 주변에 집단촌을 이뤘던 모양, 애벌레가 벗어버린 껍질이 모과나무에 유독 여러 개다.



땅속에서 기어 올라온 애벌레는 번데기 과정을 지나지 않고 탈피를 거쳐 성충, 매미가 된다. 환골탈태한 매미가 성충으로 살 수 있는 기간은 7일에서 보름 정도라고 한다. 그 며칠간 짝을 찾고자 맴 매앰, 쓰르람 신호를 보내 구애를 한 결과로 짝을 만나 알 낳고는 한살이를 마감하는 매미. 기나긴 유충의 기다림 뒤에 성충으로 사는 보름 남짓인 그 시기,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채집해서 박제시킨 매미가 무릇 그 얼마였을까. 그땐 매미가 되기까지의 인고의 세월을 몰랐긴 해도 그럴 수 없이 미안쩍은 일이 되고 말았다.



유충의 등껍질을 가르고 그렇게 우화등선하는 매미. 유전자에 각인된 코드대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본능 따라 무조건 오르고 또 오른다. 어쩐지 처연하고도 숙연해진다. 지하에서 나무뿌리의 수액만을 먹으며 유충으로 산 세월이 보통 5년에서 십 년이라고 한다. 반면 성충이 되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열흘 남짓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목청 다해 암컷을 불러 맡은 바 종족 번식의 대업을 완성시킨다. 무더운 날 쨍쨍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제 몫을 다하느라 그러니 밉다 할 수도 없겠다. 인생사뿐 아니라 생명체 저마다, 천상으로 향하기 위한 노정은 그처럼 고단한 거니까.



다채로운 결무늬 짜내리며 여름을 여름답게 하는 매미소리에 한참씩 귀를 기울이곤 한다. 맴맴~ 쓰름~ 찌익찌직~한 종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여러 가락이다. 모과나무 조경수에서 들리는 반가운 소리의 향방을 좇아 고개 한껏 젖히니 매미가 눈에 띈다. 참매미인지 말매미인지 아무튼 제법 큰 매미다. 지켜보는 걸 아는지 순간 소리가 딱 그친다. 눈싸움하듯 한참 쳐다보고 있으려니 젖힌 목이 뻐근해진다. 내가 졌다, 남 구애작전 훼방 놀 심술보는 아니니 그만 가련다.



매미의 한생, 종류에 따라 2년에서 17년까지 땅속에서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면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그날만을 기다렸으리. 부화된 알에서 온갖 천적 피해 살아남은 굼벵이는 마침내 허물 벗고 성충으로 거듭나고자 나무로 기어오른다. 비상을 위해서는 앞서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마침내는 스스로의 등을 찢는 아픔 견딘 다음에야 비로소 날개를 단 성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남겨진 허물, 매미 껍질이다. 흙을 기던 한갓 벌레에서 날개 달린 새로운 곤충으로 탈바꿈하는 일, 놀라운 변신에 경의를 표하며 하늘의 가호 임하기를. 그럼에도 짠하달까 찡해지는 마음. 시끄럽다 타박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래도 온몸으로 부르는 노랫소리 생명의 찬가이듯 건강해서 미쁘지 않은가.



한국의 경우 매미 한살이는 어떻게 다른가 찾아봤더니 미국 매미의 일생과 거의 엇비슷했다. 7년간의 기나긴 땅 속 생활, 1주에서 2주간의 지상 생활로 한뉘를 마무리하는 매미의 한살이 과정. 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일 년을 산 다음 부화해 흙을 파고 들어가 애벌레로 탈바꿈한다. 십여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땅속에서 지내다가 잠깐 지상으로 나와 성충 되어 자신의 분신을 남기고는 사라지는 매미. 모과나무에 붙은 매미껍질, 우화등선 날개 달며 벗어 둔 말간 허물이다. 매미의 헌 외투를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들고 와 괴목 분재에 올렸다. 하도 엄청스런 뉴스가 날마다 터져 나오는 판국이라 작은 기사거리는 묻히지만 매미 소리 시끄러워 밤잠 설친다는 뉴스도 들린다. 매미인들 어쩌랴. 밤을 대낮처럼 밝히는 가로등 땜에 한낮으로 헷갈려버린 매미 잘못이라 어느 뉘 탓할 수 있겠는가.



달아오르는 폭염에 초목은 겁나게 짙푸르러 지고 매미소리 날로 영글어간다. 땅 속 굼벵이가 성충으로 우화 하려면 대지를 뚫고 기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꽁꽁 다져진 콘크리트 바닥에, 아스팔트 도로에, 꿈이 좌절된 유충 무릇 기하일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수인의 편리를 위해, 자연의 질서를 수도 없이 거스른 우리다. 근자 기후변화로 무더위 가일층 강해졌다고 엄포인지 협박인지를 해대는데 이 모두가 자업자득, 원인 없는 결과는 그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매미소리가 문득 오만한 인간에게 보내는 경종처럼 들린다. 해서 감히 소음이라 타박할 수가 없네.


뉴저지에 흔한 오크나무에서 매미와 허물을 동시에 찍은 사진이다


찌익- 하는 단음으로 성하의 단풍나무 숲을 흔들어대는 붉은 눈 매미. 덩치만 컸지 소리가 매가리없이 싱거웠다. 귓청 따가울 정도로 그악스럽고 차지게 울어대는 한국 매미소리와는 천양지판이었다.
미 동부에만 서식한다는 그 매미는 1987년에 부화되어 땅속에서 무려 열 일곱 해를 지내다가 지난여름 일제히 성충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매미로서의 생애는 고작 십 수일. 허락된 그 기간 동안 부지런히 짝을 찾아 교미를 한 다음 죽음을 맞음으로 섭리를 완성시킨다는 매미다. 그 사이, 굼벵이는 예리한 호미날에 찍힐 수도 있었을 테고 허기진 새의 먹잇감으로 채일 수도 있었으리라. 가뭄으로 메말라 온몸이 타들어 갈 때도 있었겠고 홍수로 물에 잠겨 숨 막힐 적도 있었을 것이다.

고통과 질곡의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허물을 벗기까지의 긴 기다림. 17년이라면 아기가 태어나 고등학생이 되고 청년이 장년으로 바뀌는 세월이다.
보잘것없는 버러지로 꿈틀대며 어둡고 축축한 땅에 묻혀 그 장구한 나날을 지탱해 낼 수 있게 한 것.
그것은 ‘꿈을 갖고’ 라거나 ‘의지로 견디거나’ 하는 개념 이전, 기다린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고 그냥 무심히 살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기다림은 존재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며 나아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여 생이 영위되는 동안 누구에게든 기다림은 있게 마련이다. 기회를 기다리고 내일을 기다리는가 하면 그리운 이를 기다리고 메시아가 올 날을 기다리기도 한다. 제각각 빛깔과 모양새만 다를 뿐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축복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지독한 고통이기도 하다. 일각이 여삼추로 느껴질 정도의 피 말리는 절절한 기다림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또한 기다림이 물거품 되어 허망히 스러져 버렸을 때의 아득한 절망감이라니. 그래도 기다림은 궁극엔 희망과 통한다. 미래에의 꿈으로 저마다 내밀히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기다림들. 끈기 있게 기다려서 이룰 수 있는 성취라면 묵묵히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덕목이겠다. 나아가 즐겁게 기다리는 지혜도 필요한 것. 그보다 기다린다는 생각마저 여윈 무심의 경지야말로 진정 가닿고 싶은 경계이다.

2004/미주중앙일보 뉴욕판


오래전 뉴저지에서 그린카드를 기다리던 때였다. <기다림>이란 졸문에 썼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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