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 되기 싫다

by 무량화


"나는 평생 아쉬울 거 없이 살았고 바라는 바도 없다.
내가 이 나이에 왜 그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왕이 되기 싫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된 공양왕이 왕위 승계를 마다하며 한 말이다.

국운 다한 고려왕조의 비애를 절절이 체감했던 마흔 다섯 나이의 왕요는 절대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불안한 시기에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연히 그러했을 거다.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직후에 이성계 측은 폐가진위(廢假立眞), 즉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 말 앞세워 고려의 종묘사직을 마구 뒤흔든 다음 대대적인 물갈이를 할 판이다.

이에 따라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폐위해서 강릉으로 강화로 유배시켰다가 살해한다.

그 서슬 퍼런 정권 실세에 의해 어거지로 옹립되어 즉위하게 된 공양왕이다.​





직전의 왕이었던 우왕, 창왕에 대한 비왕설(非王說).

공민왕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지기 시작한 비왕설의 근거는 이러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다.

신돈의 씨라는 이러한 썰은 이성계 등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

훗날인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우왕과 창왕을 아예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 칭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대로 그렇게 1300년대 말 역사의 진실은 역성혁명 세력의 농간으로 왜곡된 채 파묻혀버렸다.

20대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34대 공양왕 재위기간은 1389년부터 1392년, 허나 아무 힘없는 허수아비였다.

재위 3년 동안 사회전반에 걸친 제도개편을 단행하였으나 그것은 이성계 일파가 세력의 발판을 닦기 위한 사회개혁이었을 뿐.

정국 혼란이 극에 달했던 1391년 정몽주선생이 살해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며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된다.

그는 원주에서 다시 삼척으로 유배되었다가 1394년 한 서린 생을 마무리했는데 비운의 왕은 사인 역시 불분명하다. ​




꼬레아라는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500년 고려 역사를 마감한 공양왕릉을 둘러보자니 회포 자못 처연스러워 흐린 하늘만큼이나 기분 묵지근했다.

능 이름은 고릉(高陵)으로 공양왕과 그의 부인 순비 노 씨가 함께 묻혀 있는 왕릉으로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은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고 사적에 나와있는 이곳.

조선 현종 때 전국의 고려 왕릉을 조사해 기록한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따르면 "현종은 고양군에서 별도로 인근 주민을 뽑아 공양왕릉을 수호하게 했다"라고 쓰여있다 한다.

세종실록에 "공양왕의 진영을 고양군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1970년 고양시 소재 공양왕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로서 고양은 고려왕릉과 조선왕릉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도시가 됐다.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의 수도 한성과 지근(至近) 거리에 있고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의 기운을 지녔다는 고양이다.


설화에 등장하는 삽살개 한 마리가 왕릉을 보호,


무덤은 쌍릉 형식으로 분묘 앞에 작은 묘표석(墓表石), 장명등, 비석,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고릉.


정자각 하나 세우지 않은 이리 단순한 고릉 앞에 서자 당연히 조선왕릉의 위용이 대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릇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패자가 되긴 마찬가지인 조선인데 고려왕릉과는 능침의 격마저 차등 너무도 확연해 보기 민망했다.


고릉이 조선조에 만들어졌다 한들, 한번 패자는 죽고 나서도 대접 이리 소홀해도 괜찮은 건지?


21세기 이 세월에 조차 소위 왕릉에 대한 전반적 관리가 이 정도로 허술하다니.

더구나 지자체가 되면서 각 지방마다 다투어 허무맹랑한 야사까지 끌어다붙여 뭐든 문화재로 격상, 꽃단장시키는 시절 아닌가.

묘역엔 뗏장조차 보잘것없어 듬성듬성 황토 드러난 잔디에다 주변 조경도 형편없어 정말이지 보기가 딱하고 심사 수란스러워졌다.

다만 홍살문 형태의 나무 울타리와 능 옆의 석상들이 고려 마지막 왕릉을 굽어 지켜주고 있었으니.

왕릉 앞에 웅크리고 있는 특이한 석물은 청삽사리다.


연못을 향해 계속 짖어대는 삽살개를 보고 이상히 여겨 못물을 퍼내자 거기 옥쇄를 품은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있어 거두게 됐다는 설화와 관련해 이 고을 이름은 왕릉골이 됐다.


그 외 인근에 식사동, 대궐고개 같은 지명이 생겼고.

이성계로부터 제거될 운명이라 어느 야심한 밤 왕과 왕비는 개성 궁궐을 벗어나 무작정 남하를 했다.


그러다 고양 견달산 기슭에 이르자 허기를 못 이겨 한 절집 문을 두드렸다.

망국의 왕으로 집도 없이 떠도는 공양왕의 신분을 한눈에 알아본 스님.


저 아래 누각에 숨어계시면 매일 수라를 올리겠다 하여 한동안 절에서 갖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 인근에 食寺里라는 동네가 생긴 연유라 한다.

또한 능원 앞에는 왕과 왕비가 자결했다는 연못 자리 흔적도 갈대 꺾인 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 순비 노씨(順妃盧氏)에게는 세 공주와 한 아들이 있었다는데 아들 역시 교살당하므로 고려왕조는 끊긴다.


의아했던 왕릉 뒤쪽에 산재한 여러 분묘는 외손인 정 씨와 신 씨 가계의 묘라 하나, 어찌 항렬로 외조부이기도 한 왕릉 위에 뫼자리를 개념 없이 쓸 수가 있었던지?

한편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데 삼척의 왕릉은 민간에서 민간으로 설화처럼 전승돼 내려온 능이다.​


기타 원주에도 몰락한 왕조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공양왕릉 바로 연달아 윗자리 산자락 따라 왕릉 못잖은 품새로 위세 좋게 묘를 쓴 외손인 정 씨, 신 씨 가묘 중 묘비명을 훌다가 신숙주 손자 무덤도 만났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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