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길게 늘어뜨린 등나무가 왕성하게 줄기를 뻗어가는 여름이다. 한참 전, 애리조나주에 사는 분이 대추나무와 무화과나무 묘목을 싣고 캘리포니아에 와 아는 분 가게에 맡겨 놓았다. 차일피일하다가 뒤늦게사 묘목분을 전달받았다. 분양해 준 나무를 진작에 받아다 심었으면 별사탕 같은 대추꽃을 올해 만났을 텐데 아쉬웠다. 자귀나무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땅을 깊이 판 다음 나무를 심고는 물을 흠뻑 주며 내년을 기약했다. 울안에 대추나무 심는 뜻은 자손 번성하고 잘 되라는 의미란다. 헌데 너른 장소 다 놔두고 하필이면 이 옹색한 자리에다? 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요즘이다. 담장이 가리개되어 그나마 땡볕이 덜 들이치기도 하거니와 수돗가라 물 공급도 수월한 명당터라서다. 그 덕에 회초리같이 가늘었던 자귀나무가 제법 귀태스럽게 자라 꽃도 폈다. 뉴저지에서 함께 챙겨 온 라일락이나 무궁화는 정원에 심었다가 다 잃고 말았지만, 담 곁이라 다행히 자귀나무는 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화분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는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푸른 잎이 보이기는커녕 메마른 갈색 줄기에 개각충((介殼蟲) scale insect)이 잔뜩 붙어있었다. 개각충은 식물의 잎이나 줄기에 붙어 즙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해충이다. 눈에 띄는 즉시 빠르게 손을 쓰지 않으면 결국 본체를 시들시들 말라죽게 만든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개각충이란 이름조차 생소
하니 처음 들을 정도로, 특별히 원예에 흥미와 관심 둔 경우가 아니면 개각충을 알아볼 리 없다. 생물이면서 눈에 띄는 움직임도 없을 뿐 아니라, 생김새도 벌레 같지 않게 딱지 같은 돌출물이 딱딱한 겉껍질을 쓰고 따개비 붙듯 붙어있다. 그래서 방제도 쉽지 않은 고약하고 귀찮은 벌레다. 연갈색으로 위장해 줄기에 붙으면 그냥 줄기의 변형으로 보일만치 거의 구분도 안된다. 건조하고 통풍이 안 되는 실내에서 흔히 생기며 급속도로 퍼지는 특성을 가진 해충이다.
60년대 초인 예전, 군 소재지 시골에 화원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집엔 유리로 된 온실이 있었다. 그즈음 막 연탄 공급이 되던 시절이라 겨울엔 난로를 피워 온실은 오붓한 독서실이 되기도 했다. 반면 뭐든 무성해지는 여름은 물도 자주 줘야 할뿐더러 꽃 관리에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바쁜 철이었다. 유난히 해충도 많이 꼬였다. 장미의 진딧물이나 응애 정도는 약과였다. 고무나무, 팔손이나무, 몬스테라, 벤자민, 동백 등 잎이 도톰하면서 광택 나는 관엽식물에는
개각충이 잘 붙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아끼는 풍란에 개각충이 생겼다 하면 비상이 걸렸다. 이파리에 이상스레 끈끈한 질감이 느껴지면 개각충이 있다는 신호라, 곧바로 잎 앞뒷면과 줄기를 꼼꼼스레 살펴가며 제거해 줘야 했다. 오돌토돌 걸리는 벌레를 일일이 손끝으로 긁어 비벼서 납작 누른 다음 물걸레로 잎을 닦아줌으로써 퇴치작업은 마무리됐다. 화훼 계통
과 일찍부터 친하게 지냈기에 한눈에 단박 무화과나무가 개각충에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잎에 붙어살면 잎에 구멍을 내 관엽식물을 흉하게 만들고, 줄기에 붙어 있으면 수액을 빨아먹으며 겁나게 번식을 해 원 나무를 고사시키는 개각충. 말 못 하는 식물이니 골골대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어서, 임시로 나무를 맡아 속걱정만 했을 친구에게 오히려 미안스러웠다. 개각충의 성향을 아는 나로선, 같은 공간에 있었던 대추나무로 전이되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전이, 그렇다. 마치 암세포처럼 소리소문 없이 번져가며 개각충은 주변 식물로 잠식해 들어와 생명을 앗아간다. 거기다 해충 아닌 척 시침 떼고 슬슬 접근하는 방식이, 음험한 위장꾼과도 겹쳐지는 비열함은 또 어떻고. 암튼 재수 없는 존재로, 이름까지 되게 거지발싸개 같다는 궁시렁이 따른다.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즐거운 생각만 하고 살아도 짧다는 한세상. 인증샷 하나 찍고 해충이 붙어 곯아버린 무화과나무는 소각시킨 다음, 나쁜 기운들을 털어버리려 옷자락 훌훌 흔들어 털었다.
등나무 시렁 너머, 대추나무는 새로 이식한 후의 몸살 기운도 보이지 않고 싱싱해 퍽 대견스럽다. 이제야 비로소 안정된 자리를 찾아 안도한 듯 나날이 뿌리 잡아가는 대추나무. 멀리서 대추나무 시집을 보낸 분 얘기로 대추알이 굵고 달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무럭무럭 자라 내년에 대추가 열리면 첫 대추 수확해 자랑질 포스팅도 올리게 될 거고. 연한 대추잎이 어서 땅내 맡아 짙푸르러 지기를 기대하며 아침저녁 생명수를 듬뿍 대접해 준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