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어릴 적 학교를 결석하게 된 주된 원인은 세수하다가 느닷없이 흐르는 코피 때문이었다.
일 학년 통지표에 결석일수가 17일로 기록될 만큼 학교를 빠지는 날이 잦았다.
그렇다고 횟배를 앓아 비실거린다든지 온 얼굴에 버짐이 필 정도로 영양상태가 나쁘거나 선천적인 약골인 건 아니었다.
단언컨대 학교 가기 싫다며 땡땡이치려고 꾀병 앓는 시늉을 한다거나 딴전을 부린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요즘도 학교 가는 일은 즐겁고 신바람이 난다.
솔직히 맨날 그 타령으로 도대체 늘지 않는 영어공부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각국의 다양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어서 재미지긴 하다.
특히 맑고 명료한 시간대에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규칙적인 걷기운동을 매일 할 수 있어서 신이 나는 것이다.
한낮의 뜨거움을 피한 시간대인 아침 여덟 시 집을 나서서 삼십 분 동안 상쾌한 대기 속을 비타민 D까지 합성해 가며 성큼성큼 걷노라면 살짝 땀이 날 즈음엔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무엇보다 빠짐없이 꼬박꼬박 일주일의 닷새간을 계속 준칙에 맞춰 운동할 위인이 못 되는 자신임을 알기에 그래서 학교가 더 고마웠다.
무상의 여러 혜택을 누리며 알뜰히 하루하루의 일상을 감사 속에 누려왔는데 그만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올봄 들어 고약스럽고 귀찮은 불청객인 꽃가루 알러지의 방문으로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어난 것.
칸트 아저씨의 산책처럼 정확히 지켜지던 시간과 동선의 규범에도 일대 혼선이 빚어졌다.
그 바람에 거의 개근상을 받을 만큼 우수한 범생이의 일과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웬만한 의지가 아니라면 또는 건강상의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면, 일정 패턴의 운동을 꾸준히 실행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것도 거의 사 년 가까이 꾸준히 이어져 온 일이니 대단도(!) 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데 시조창은커녕 입도 뻥긋 못하면서 그간 들인 공력 내세우기가 부끄럽긴 하다만. ㅎ
이즈음엔 버릇처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본다.
등굣길에 나설 수 있을지 어떨지 기상 진맥부터 짚기 위해서다.
휴대폰을 열어 스마트하게 자외선 지수나 비 올 확률이나 최고기온을 체크하는 게 아니라, 아날로그 세대답게 나뭇잎 흔들림을 예의 주시하려는 참이다.
거의 날마다 푸른 하늘에 쾌청한 날씨를 보이는 이곳이니, 바람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나뭇잎은커녕 풀잎 끝도 미동을 않는다, 당연히 슬슬 일어난다.
이파리가 보일락 말락 가벼이 살랑거린다, 이 정도라면 일어날 준비를 한다.
잎새마다 나붓대며 나무 가지도 약간 흔들거린다, 일어날까 말까 잠시 고민한다.
나무줄기만이 아니라 우듬지부터 밑둥치까지 요동을 친다, 더 보나 마나 할 것도 없이 다시 눕는다.
일단 바람이 강하게 일면 모래먼지도 먼지려니와 거리 먼 프레즈노 과수단지의 아몬드 꽃가루까지 무차별적으로 들이닥친다.
근자 얼떨결에 단단히 혼이 난 알러지라, 알러지원 자체를 차단시켜 항원체와의 랑데부를 막기 위해서이다.
처방약 덕에 가까스로 놓여난 알러지인데 대기 속에 나서기만 하면 용케 알고 증세가 덧들리니 조심하지 않을 수가 있나.
가벼운 바람 정도면 큼직한 선글라스에 마스크 대신 스카프로 입을 막고 나서겠지만, 바람 거칠면 그 정도의 대처로는 소용이 없다.
또다시 눈물콧물 흘리며 여기저기 긁적거릴 일을 생각하면 내심 겁부터 난다.
외출을 삼가고 문마다 꼭 닫아놓고 꼼짝없이 집안에서 근신, 외부 대기 속에 섞인 온갖 항원들에 직접적인 노출을 줄이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다. (회피요법)
이 아침에도 눈뜨면서 곧장 바깥부터 탐색해 봤다.
바람이 느릅나무를 정신없이 흔들어대고 있다,
기세등등한 바람의 모양새가 단숨에 나를 질리게 만든다.
마악 꽃봉오리 열려던 파피는 멀쑥하니 긴 꽃대궁 바람에 내맡긴 채 속수무책 떨고 있다.
간밤엔 아뭇소리도 못 들은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일기 시작한 바람일까, 나뭇잎 풍속계를 보니 당연히 엄두가 안 난다.
핑계김이 아니라 학교건 운동이건 오늘도 도리없이 제쳐지고 만다. 하릴없이 그냥 돌아눕는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