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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5. 2024

곡진한 또 한 분의 순애보 ㅡ  김순이 시인

서귀포 문화예술인 인터뷰

이중섭 거리 옆 태평로 371번길 벽화

제주섬 서귀포에 깃들면서부터다. 여태껏 섬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선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미지의 섬을 탐색해 나갔다. 때로는 발길 따라서, 때로는 글을 통해서.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서귀포 문학지에 실린 <불멸의 연인, 의녀 홍윤애>란 글을 접했다. 중편소설 가까운 분량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제주 시내에 홍랑로로 남아있는 의녀 홍윤애, 당시 이웃에 유배 온 조정철을 자진해서 수발들게 되면서 연은 시작되었다. 조정철은 정조 시해기도사건 연루 혐의로 정유년(1777)에 제주로 유배와 무려 스물일곱 해나 적소에서 지냈다. 석방 후 다시 관직에 올라 1811년 한 서린 제주에 목사로 부임해 일 년간 재임했다. 이때 자신을 대신해 희생당한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산담을 쌓은 뒤 칠언율시를 짓고 '洪義女之碑 '라 각인한 묘비를 세웠다. 큰 이모 품에 안겨 산새미오름 절간으로 피신해 자란 여식을 수소문해서 부녀 상봉을 한 뒤 호적에 올렸다.



이는 <정헌영해처감록>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의 문집인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은 유배 문학의 전형이다. 유배지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연은 이 문집에 남겨져 있다. 홍윤애,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사랑이라서기 보다는 딸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처참하게 옥사당하고 만 운명이라서 애틋하기만 한 여인.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격정으로 불붙는 사랑이 아닌, 먼먼 우주의 섭리에 따르듯 한 신비롭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닐까. 불멸의 연인을 읽은 그 이튿날 내 행선지는 기어이 아니 당연히 홍랑로와 애월 유수암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삼월 초였다. 그날은 눈 속에 피어난다는 복수초를 찾아 한라수목원을 누비던 중이었다. 봄볕 다사로운 양지쪽에서 복수초를 만나 들떠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생면부지의 여성분이었다. 자신을 시 쓰는 김순이라고 소개했다. 복수초를 찾아 산에 올라왔다고 했더니 제주에서는 그 꽃을 눈색이꽃 또는 얼음새꽃이라 부른다고 일러줬다. 이름이 참 이뻤다. <희망 서귀포>지에 실린 강중훈 시인 인터뷰 기사를 잘 읽었노라고도 했다. 한마디 한마디마다 분에 넘치는 성원, 날개깃 달아주며 등 다독여 응원해 주었다. 어느 순간, 의녀 홍윤애에 관한 글을 쓴 분이 김순이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근원을 관통하는 아스름한 기운이 문득 감지됐다.

 

화제는 무궁무진, 삶과 문학과 일상사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십년지기 아니 백아와 종자기가 이러하려나. 우리의 통화는 한 시간 넘도록 계속됐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와 그토록 오래 속내 터놓고 대화를 나눈다는 거 자체가 처음 있는 일, 파격이었다. 물론 일천한 이력의 나, 그럼에도 제주에 와서 맨 처음 만나 뵌 문인은 강 시인이었고 처음으로 전화를 주신 분은 김순이 시인,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그녀의 시처럼 외지 떠도는 외로운 이름일수록 한번 불러주고 싶고 외로운 이름일수록 한 번 더 안아주고 싶어서였을지도.



서로 역사에 관심이 많은 데다 취향이 비슷해 우리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더러 만나게 됐다. 김시인이 주관하는 제주신화 강좌에도 참석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귀포문화예술인 인터뷰이 대상으로 청을 넣게 되었다. 그때마다 번번 손사래 치며 대신 다른 작가부터 인터뷰하라면서 천거를 해줬다. 자신은 줄곧 나중으로 미뤘다. 이태나 미룬 일, 이번에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 선 것은 수선화로 인해서이다. 지난해 입춘 무렵, 김시인이 향기 그윽한 수선화를 푸짐하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시집 서문에 수선화 올레에서 산다는 글귀도 보았으니 수선화 피는 신춘에는 필히 김시인을 만나기로 작정했다. 미리 약속을 하고 엊그제 드디어 수선화 올레로 들어설 수 있었다.



1946년 제주 시내에서 태어난 김순이 시인은 중학 다닐 때부터 글쓰기에 맛 들였다. 여고시절 뛰어난 문재로 학원지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64년 산문 <사마귀>로 학원 문학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제주여고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제주도가 떠들썩해질 만큼 센세이션 한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훗날 <오름 나그네>를 펴낸 언론인인 김종철, 1927년 생이니 열아홉 살 차가 나는 남자와의 사랑을 반길 부모는 없을 터. 더구나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부친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니, 제주 유지이셨던 아버지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는 부모님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 결국 두 사람은 1972년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한다. 그렇게 법주사에서 성타스님 주례로 혼례를 치렀다. 그날로 <제주신문>에 ‘저희는 속리산 법주사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란 광고를 냈다. 쇼킹을 넘어 맹랑 발칙할 정도의 그런 과감한 용기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아마도 늘상, 세상에 태어난 몫을 해라, 배운 값을 하라고 가르친 외할머니 영향이지 싶다는 그녀. 일찍부터 제주 여인들은 남편이나 자녀 등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관습에 익숙해 있었다. 실제로 어릴 적 방학을 맞으면 외할머니는 바다로 데리고 가 물질을 훈련시켰다니 그에 연유해서일지도. 바다와 친근한 그녀는 나이 들어 해녀 전승위원으로 2016년 제주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성공시키는 데 앞장섰다.



김시인의 '정신의 그믐'이란 시 일부다.

....

갈림길에서 나는 기꺼이 비포장도로를 택하였다

부르튼 발을 앓는 밤마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건너가는 불면

두려운 것은 궁핍이 아니라

기름진 삶이 가져오는 정신의 그믐이었다

높이 날기 위하여 창자를 비우는 새

겨울을 건너가기 위하여

알몸이 되는 나무

그들에게서 나는 배운다

무거운 이 세상 건너는 법을



산에 심취한 산사람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어 결혼을 피하던 남자에게 “내가 가족은 먹여 살리겠다"라며 열정적으로 대시한 처녀 선생님. 다섯 살 때 어머니, 열다섯에 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여의고 이후 내내 의붓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살았던 남자였다. 피폐한 환경 속에서 한라산과 오름 오르며 그 자신을 겨우 지탱해 온 남자. 그에게 한라산은 푸근한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었다. 잠깐 교직생활을 했으나 주로 지역 신문사 기자와 방송국 편집국장 직에 있었지만 그는 산에 사로잡혀 천 번도 넘게 한라산을 오른 남자다. 스물여섯 처녀가, 다들 말리는 나이 지긋한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생명의 에너지를 진작에 소진한 듯한 그를 잡아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였다.



제주도 오름 330개의 첫 탐사기로 ‘오름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오름 나그네> 3권을 1995년에 펴내고 김종철 선생은 늑골암으로 눈을 감았다. 우리에게 이리 소중하고 아름찬 오름으로 가는 길 밝게 열어놓아 주시고. 그러고는 평소 바람대로 봄이면 산철쭉 피고 겨울이면 하얀 설원 펼쳐지는 선작지왓에 뿌려져 한라산 흙이 됐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2019년 4월 선작지왓의 탑궤에서는 특별한 책 헌정식이 거행됐다. 첫 번째 책이 나온 지 24년 만의 <오름 나그네> 개정판이었다. 오류와 오타를 손수 찾아내 반듯하게 고친 새 책을 저자인 선생의 부인 김순이 시인이 헌정한 것이다. 미쳐야 미친다 했던가. 진정 어린 순애보는 그렇게 쓰였고 완성되었다.



다음은 '미친 사랑의 노래 7' 전문이다.



미친 사랑은 행복하다

시에 미치고

그림에 미치고

음악에 미치고

춤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고

혼자 미친 것도 좋지만

보는 사람마저 미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위대한 미침

두려워 마라

미치는 것을



한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것, 하지만 자기 노력하기 나름이기도 하다. 결혼 후 첫 근무처였던 여학교를 퇴직하고 그녀는 생계를 위해 임시직으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서 자격시험을 통해 민속연구원이 됐으며 연구 실적을 되쌓아나갔고 성공적인 기획전을 열어 입지를 다져갔다. 동시에 열심히 현장을 찾아다니며 민속 조사에 매진해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이 되었다. 그 배경의 힘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북돋우고 배려하는 동지애적 부부애로부터 나왔다. 이를테면 시너지효과가 극대화되었던 셈으로 서로를 업그레이드시켰던 것. 그리하여 남편은 소망했던 제주의 뭇 오름을 마음껏 누비며 집대성시킨 '오름 나그네'를 발간할 수 있었다.



제주 토박이말을 오롯이 살려낸 문장으로 삼백여 개가 넘는 제주 기생화산의 가치를 처음으로 조명해 밝힌 김종철 선생이다. 한라산과 오름에 반해서 수시로 산 사나이가 되었던 그. 설렘으로 오름 답사에 나선 날이면 저녁엔 조사한 자료를 일일이 구슬 꿰듯 엮어 한 편의 원고로 정리해 두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듯이. 오름이 관광 상품으로 거듭난 요즘과 달리 초창기에는 오름길 정보 자체가 전무한 데다 가는 곳마다 가시덤불은 예사, 한마디로 판이하게 다른 오름 환경이었다. 이에 각 오름의 위치와 명칭을 확인하여 안전한 길을 안내해 주는 길라잡이 역에 충실했던 그에게, 국립지리원에서 나온 5천 분의 1 제주도 지도 한 세트를 선물한 아내. 너무나도 좋아 고맙다며 눈물짓던 눈매 아름다웠다는 그 남자.



아내는 아내대로 열정 다해 주어진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제주 섬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전설과 설화를 채집했으며 토속품과 유물들을 틈틈이 수집해 나갔다. 제주신화의 대가로 우뚝 설 정도의 독보적인 실력은 그렇게 쌓아졌다. 전통문화 보존과 그에 따른 연구 꾸준히 한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 동백장, 그 외 제4회 예술인상, 제8회 덕산문화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관, 제주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제주문화 전반에 헌신해 왔다. 마지막 봉사로 2020년 겨울, 제주문화원 창립 이래 처음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김순이 시인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2023년까지 제주문화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제주문학관 관장이다.


제주의 대표 시인이며 원로 시인인 김시인은 시집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1991)를 시작으로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향하여>, <미친 사랑의 노래>, <초원의 의자>를 연달아 펴냈다. 시집 <오름에 피는 꽃>과 시선집 <기억의 섬> <그리운 꽃 한 송이> <제주 야행>을 출간했다. 그 외에도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2012), <제주도>(2014), <제주신화>(2016)를 비롯 <제주테우문화>를 공동 집필했다. 제주도 잠수용어 조사보고서(1989), 제주도의 옹기공예(1990), 제주의 초공예(1994), 제주의 구황음식(1995), 제주해녀의 전승언어(2004) 등 제주 민속에 대한 귀한 자료도 다수 남겼다.



김시인은 제주 역사 속 여성들 중에서 특히 기억해야 할, 몇 분을 꼽곤 한다. 의녀(醫女) 장덕, 열녀(烈女) 천덕, 해녀(海女) 금덕, 그리고 의기(義氣) 로운 만덕과 홍윤애를 스토리텔링화하여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역작 <제주 신화>를 펴낸 그녀는 지난 2000년부터 심방(무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어를 현대 우리말로 바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기는 공도 세웠다. 신들의 내력담을 읊조리며 신에게 바치는 찬가가 징 소리에 실려 쟁쟁 울리는 굿판은 '제주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장'이라 설명하는 그녀. 또한 여러 현장에서 몸소 굿을 체험한 그녀는 당당히 '굿은 미신(迷信)이 아니라 미신(美信)'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하듯 그녀에게는 제주의 머나먼 과거사로 잊혀져 가는 신화와 역사에서부터 민담과 전설에 관해 아직도 풀어내야 할 재료가 첩첩 쟁여져 있다. 그녀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진 내재돼 있기에 모쪼록 건강관리 잘하길 바란다는 당부 야물딱지게 전하고 또 전할밖에.



김시인은 여덟 해 전 성산읍 난산리로 이주해 왔다. 차도에서 집까지 이르는 좁은 골목인 올레로 접어들면 돌담에 서리서리 송담 무성히 벋어있고 수선이 소복소복 깔려있다. 저만치 담황색 지붕을 인 조촐한 집 한 채. 시인의 뜨락에는 살짜기 봄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목련 봉오리 도톰해졌고 그 옆에 붉은 꽃잎 낙화 진 애기동백 한 그루. 어느새 백매 홍매 화들짝 피어나 뜨락 가득 멧새 지저귐 흥건히 고였다. 작은 연못에는 봄 되면 노랑어리연꽃 몇 포기 동동 떠오를 듯.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새벽잠을 깨우는 뜨락에 수선과 목련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있는 김시인. 집필 외에 틈틈이 제주신화와 전설 및 제주 돌문화 강의를 병행하면서.



미치도록 사랑했던 이와 하나로 맺어져 슬하에 아들을 두고 사반세기 가까이 행복하게 살았으면서도 아쉬움 하도 진해서이리라. 객관적으로는 충만한 삶을 살았노라 자신할 만한 여건임에도 김시인의 시가 주는 느낌은 옷깃 여미게 하도록 왠지 고적하다. 아릿하고도 서늘해 종당엔 먹먹하게 만든다. 시의 결이 바람을 닮았는가 하면 용암을 닮기도 한 김시인의 시. 똑 부러지게 당찬가 하면 매사 정갈하게 매조지는 결기 예사롭지 않아서일까. 내심 지란지교를 꿈꿔보나 김시인은 범접하기 쉽잖은 전아한 품격으로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한아름 수선화를 안겨주며 살가이 맞잡아 주는 손길 퍽 따스했다. 마음에까지 온기 스며들 만큼.



이쯤에서 김순이 시인의 <한라산 5>로 신춘 탐방기 갈음하고자 한다.



산에는 숨겨진 꽃밭이 있습니다

어진 향기 지닌 이들이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모여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할 줄도 모르고

양심이니 진실이니

하는 말을 할 줄도 모르는

그저 주어진 제 삶을 힘껏 살아가는

그런 이들이

뿌리내린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삶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높고 큰 명성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작지왓 탑궤에서 문인, 산악인들과 개정판 <오름 나그네> 3권을 저자에게 헌정하는 아내(뉴스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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