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by 무량화


임시수도기념관(臨時首都紀念館)은 부산 서구 부민동 2가 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민동으로 옮겨 온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 3가 221번지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경남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며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가 됐다.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정부는 서울로 10월 27일 환도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4 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성립과 함께 환도할 때까지 부산은 중앙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였다. 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된다. 관저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사빈당은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 후 정화작업을 거쳐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관한 대통령 관저의 당호(堂號)이다. 개관에 즈음하여 역사학자 정중환 선생이 지은 당호를 독립운동가 한형석(韓亨錫) 선생의 글씨로 현판을 새겨 걸었다. 사빈은 ‘빈(나라이름 빈)을 생각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의 빈은 주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고공단보 (古公亶父)가 다스렸던 나라이다.



고공단보는 빈을 덕(德)과 의(義)로써 다스렸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다, 북방의 오랑캐가 침략하자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지 않고 빈을 내주고 주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빈의 백성들도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왔으며, 그이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이웃나라 백성들까지 무리를 이끌고 귀의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후대에 이르러 빈을 회복하고 중국 전체의 패권을 장악한 주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사빈당’이라는 당호(堂號)는 ‘고공단보와 빈’의 고사에 빗대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의하여 서울 내주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마련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빼앗긴 땅을 수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즈음 '나라의 백성이 그를 받들었다' 란 뜻의 사빈당을 재삼 천착해보게 되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므로 인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몫으로 돌리겠다. 공과도 마찬가지다. 그중 공적, 잘한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소작제를 철폐하고 농지개혁을 실시한 점이다. 둘째는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시킨 일로 이는 역사가 인정하는 이대통령의 치적이다. 포로 석방에 반발하는 미국 측에 “전작권을 다시 가져오겠다” 라며 초강수 둔 일과 그로 인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태동되는 초석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셋째는 1952년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냈다. 문맹퇴치와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해 교육개혁을 이룬 일 등등. 오늘은 부산에 위치한 임시수도기념관과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물론 내 나이로 보나따나 반공교육에 길들은 세대라는 것은 인정하고 시작하니 참작하길.



임시수도기념관은 1950년부터 약 2년 6개월 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던 곳이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이 거리의 슬픈 역사는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향하는 계단 정상부에 덩그러니 놓인 동상 받침대가 이를 말없이 대변한다. 동상은 온데간데 없고 받침대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속사정은 무엇일까. 원래 이 자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높이 1.7m)이 세워져 있었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이 전 대통령이 왼손에는 펼쳐진 책을 들고, 오른손은 허공을 향해 펼친 채 전방을 주시하는 동상이었다. 2011년, 설치된 지 3개월 만에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은 철거됐다. 전날 오전 동상이 붉은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편벽된 사고로 이처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이 거리는 여전히 우리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평가해 줄 것임에도 이처럼 성급하게 어쭙잖은 제 판단기준에 의한 만용을 부리는 졸렬한 광기는 언제쯤이나 누그러들까. 극단적 흑백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균형감각이 이런 점에서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승만이 친일파 척결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크게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것이 친일파의 기준이 과연 정확하게 무엇이냐 라는 점. 민족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또 일제 36년이란 세월이면 거의 반세기 가까운 기간에 친일파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그 대상이 많았다는 점. 가령 어느 한 집이 친일파 인사로 규정되면 그로 인하여 그 가문의 친인척, 사돈에 팔촌까지 연계가 되기 때문에 그 후폭풍이 두려웠다는 점 등이 있다. 따라서 과연 친일파 척결이 지금 우리가 입으로 외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겠는가는 한번 깊이 숙고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지.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8년 자신을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야당과의 첨예한 정치파동을 낳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그는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원인이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 하야를 요구하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4.19가 1주일 지난 4월 26일, 이박사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28일, 이박사 부부는 경무대를 떠났다. 이화장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이박사 내외를 따뜻하게 맞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박사는 이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자애로운 할아버지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결국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기에 이른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국에 갈 날만 갈망하던 그는 망명생활 중 사망했다. 유해는 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