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금, 이 순간도 역사가 된다

by 무량화

이웃 동네 대로 상에 있는 안경점 앞에서 문득 멈춰 서게 되었다. 해묵은 사진이 안경점 유리창에 붙어 있어서였다. 현대식 건물에 인테리어 세련된 안경점에 촌스러운 사진을 그것도 이주 크게 확대한 패널을 내걸다니. 필시 광고의 일환일 테고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지는, 하단에 쓰여있는 1974년이란 잔글씨로 확인됐다. 이곳 한자리에서 1974년부터 지금껏 안경점을 해왔으니 신용도는 미루어 짐작될 터. 따라서 신뢰도 역시 이 사진 한 장으로 증명된다. 가게 안을 넌지시 들여다봤더니 저 젊은 청년은 칠십 줄이 넘은 대머리로 변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넉히 그럴만하고도 남았다. 주인장으로선 당연히 긍지로 삼을 법했다. 안경사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의 안경점은 아무나 쉽게 덤빌 수 있는 업종이었다. 용케 목이 좋은 곳을 잡으면 안경점을 한 친구네를 보니 수입도 쏠쏠했다. 번화한 대학가도 아닌 동래시장 근처, 묵묵히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을까. 허나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대를 이어 찐빵이나 우동을 파는 가게가 일본에 있다고 들었다. 그와 다른 한국은, 특히 요즘 같아서는 가게 운영이 6개월을 못 넘긴다니 간판장이나 신이 날는지. 그처럼 부침 심한 자영업계다.


오십 년 가까운 일월을 한결같이 지켜온 영업장. 그동안 얼마나 숱한 일들을 겪었을 것인가. 흐뭇한 일 억울한 일, 기분 좋은 일 골치 아픈 일, 오만가지 여러 일들이 생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일상사가 되면서 무상심하게 흘러간 세월. 무심코 살아가는 일 그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가 된다는 걸 그땐 몰랐다. 남들 살아내듯 그저 그렇게 사는 건가 보다 여기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시간이 쌓여 어언 오십 성상. 가게를 운영하며 식속들 살림을 꾸려나갔을 테고 자녀들 교육도 시켰을 것이다. 그 세월이 어느 결에 아주 자랑스러운 계급장이 되었다. 무심코 살아가는 일, 그 하나하나가 모여 개개인의 역사가 되었기에.



통영, 하면 이순신 장군보다 먼저 떠오르는 게 충무김밥이다. 그만큼 유명한 충무김밥인 만치 통영 시장통 집집마다 서로 원조라고 내세운다. 손님이 그래도 석연찮은 눈치로 간을 보며 서성댈라치면 '여기가 원조 할매집'이라고 목청 한껏 높인다. 젊어서부터 나이 들도록 이 일을 했노라며 서슴없이 그 앞에 할매란 말을 훈장처럼 달고 훅 들이대는 상술. 까탈스러이 탐색하며 미심쩍어하던 눈빛은 그쯤에서 눅어 들어 순해지고 만다.



특정 맛집골목에 들어가면 어디나 풍경 엇비슷하다. 돼지국밥 골목은 골목대로, 추어탕 동네는 그 동네대로 자기네가 처음부터 자리 잡은 원조 터줏대감이라고 우겨댄다. 부산 밀면집 즐비한 시장통에선 숫제 이북 사투리 자연스럽다. 육이오로 월남한 게 언젠데 아직도 피난민 비스므레한 코스프레 여기저기서 펼친다. 재래시장 참기름집은 또 어떤 내숭을 떠는가. 웃기게도 진짜 참기름집이라고 감히 당당하게 거짓말을 친다. '진짜'는 뭐고 '참'은 뭔가, 그게 그거다.


동래파전은 산성 막걸리와 세트로 동래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친다. 그런만치 금강공원 언저리에는 동래파전집이 아주 흔하다. 이 식당 역시 색 바랜 예전 사진을 대형 패널로 만들어 담벼락에 걸어뒀다. 파전과 장 항아리는 쉬 연결점이 이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장독만으로 할머니 솜씨가 연상될 법은 하다. 예전, 저 초라하게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찌짐을 구워 팔던 아짐이 할머니 된 세월이 자동으로 읽힌다.
아무튼 파전 하나로 성공, 지금은 위풍당당한 식당으로 성장했으니까. 그렇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저마다의 역사로 남는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모두에게 역사로 아로새겨지거늘.



미국으로 이민 가서 처음 한동안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지나 조선을 거쳐온 긴 역사의 한국에 비하면 얇디얇아 하찮게 여긴 미국 역사였다. 자신감 결여 시 나타나는 어설픈 허세였으리라. 자격지심을 짐짓 포장하려는 허장성세. 아마도 미국이라는 막강한 외형에 주눅 들어서였을 터다. 깊고 넓은 중량감을 지닌 대하 같은 우리 역사를 견주며 괜스레 얕은 냇가처럼 폄하했었다. 그러나 이백여 년의 짧은 역사 속 미국이 1736년 공립병원을 세웠을 당시. 조선은 한창 노론 소론 격론 벌이던 시기였다. 심지어 그 미국은 식민지 국가였던 우리를 광복으로 이끌어낸 나라다. 역사 연대표란 따지고 보면 가볍디가벼운 종잇장 속 박제된 부호일 따름이다. 이처럼 국가만이 아닌 한 개인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저마다 자신의 역사를 새겨나갈 뿐 아니라 나라의 역사도 만든다는 이 준엄한 진실. 하여 오늘 하루 일상들이 가벼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