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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0. 2024

하마터면 설국에 갇힐 뻔

천백고지 눈구경 하려다가


12월 어느 날이다. 폭설과 강풍 영향으로 올겨울 들어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올 거라 했다.

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에 대비해 선제적 대응 체계를 대폭 강화시켰다는데.

그 와중인 오늘 오후, 마침 중문까지 간 김에 천백 고지 설경을 탐내게 되고 말았다.

핑계는 언제나 그럴싸하다.

한 해 한국어 수업을 마무리 짓던 날, 수업 듣는 학생과 토요일에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축구 선수로 열심히 뛰는 중학 1년생이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서귀포 명소를 구경시켜 주기로 약속한 것.

아빠 엄마가 하루 종일 일 나가는 가정이라 서귀포 시내 살면서도 정방폭포조차 가본 적 없다니 짠했다.

애들은 한식을 별로 내켜하지 않겠고 햄버거는 너무 약소한듯해, 뭘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쌀국수를 먹겠다고 했다.

베트남 아이라 베트남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자구리 몬스테라로 가려다가 운동을 하는 아이니 듬직한 음식으로 바꿨다.

더본호텔 뷔페라면 쌀국수도 맛볼 수 있기에 거기서 아점을 먹었다.

식사를 하며 내다본 창밖으로는 소담스러운 함박눈이 휘몰아쳤다.

서귀포 시내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엄청난 폭설이었다.

중문 거리가 백설에 파묻혀 온통 희뿌얬다.

한라산으로 눈 구경 갈래?

초등학교 5학년까지 눈이 오지 않는 베트남에서 살다 온 아이라 이처럼 함박눈 내리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을 터.

고개 끄덕이는 아이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먼저 천백 도로 교통 통제가 되지 않았는지 064-120 만덕 콜센터로 전화를 해봤다.

변화무쌍한 기상상태라 240번 버스회사인 064-753-1621로 문의하거나 제주경찰청 안전계로 전화해 보란다.

소형차량은 전면 통제됐지만 체인을 감은 버스는 11시 반부터 운행이 재개됐다기에 중문초등 맞은편에서 차를 탔다.

한라산 자락 초입, 중산간도로를 건너자마자 경찰차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통통제를 하며 단지 버스만 진입을 허했다.

버스 승객은 통틀어 다섯 명.

오가는 차량 통행이 전혀 없어 적요하다 못해 괴괴한 천백도로.

사태 져 퍼붓는 눈 속을 느리게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섰다.

눈보라 치는 산자락 한편에 비켜서서 운전기사가 스노 체인을 감기 위해서였다.

뭔 눈이 이리 온다요? 툴툴거리며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면서 기사가 들어왔다.

영실 매표소까지 느릿느릿, 노선버스라 빠짐없이 들어갔으나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승객 하나가 잠깐 사진 찍고 싶다고 하자 기사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모두들 호기를 놓칠세라 밖으로 나가 동영상을 담았다.

아이는 신이 나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셀카를 찍었다.

다시 버스는 눈고래질 치는 한라산 깊숙이로 파고들었다.

영실 다음이 천백고지 습지, 거기서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타는 이들은 있으나 내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척 구분조차 힘든 눈사태를 접하자 우리는 감히 내릴 엄두를 못 내고 다들 그냥 제주시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다음 버스가 오리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상황, 자칫 눈 속에 고립될 판이니 아무도 만 부리는 이는 없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시베리아의 눈처럼,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발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산길 내려가는 도중 제설차가 불 환히 밝힌 채 눈길을 쓸며 한라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리목을 지나 한라산 천아숲길 입구를 지나 제주호국원을 지나 노루생이를 지나 한라수목원 지날 즈음이었다.

버스 기사가 정차를 시키더니 차에서 내렸다.

이번엔 바퀴에 장착시킨 체인을 풀기 위해서였다.

스노 체인을 감고 풀고... 그러느라 머리칼 희끗한 기사 양반 목장갑은 푹신 젖었다.

세상에 어렵고 힘들지 않은 직업이 있으랴마는 오늘따라 운전기사 일이 무척 고돼 보였다.

과연 산 아래 길섶에는 눈이 조금 쌓였을 뿐 도로는 새카만 아스팔트가 드러나 있었다.

어찌어찌 제주 버스터미널 종점에 닿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서귀포 가는 182번 급행 버스에 올라탔고, 한 시간 반이 지나자 반가운 중앙 로터리가 보였다.

서귀포 시내 역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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