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되는 교수법

2015

by 무량화


첫 번째 근무처는 공립 여중고였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발령받아 간 곳은 나의 모교로, 고 3 때 담임이셨던 분이 교무주임으로 재직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어 아무런 애로점이 없었다.

그분은 갓 부임한 초보선생의 입지를 공고히 정립시켜 주었으며 연구수업 때는 교안작성도 적극 도와주셨다.

이른 결혼으로 교직을 떠났다가 음식도, 말투도 생경한 타지 대구에서의 시집살이가 불편해 다시 복직을 했다.

이번엔 면소재지에 있는 남녀공학 사립학교였다.

소박한 충청도 시골이라 담임을 맡았던 중 2 우리 반 아이들은 문제아나 결손가정 학생 하나 없는 순둥이들 뿐인 데다 한마음으로 똘똘 합심해 교실을 가꾼 덕에 환경미화심사는 우리가 항상 일등을 차지했다.

만족스럽고 뿌듯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고등학생들 수업시간만은 별로 달갑지가 않았다.

농촌지역이므로 중학교만 마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늦깎이로 고등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나이도 제법 들어 곧 군대 갈 즈음인 데다 덩치도 무지 컸다.

거기다 과목이 주요 영수학과도 아닌 만만한 미술시간.


남학생들은 거의가 관심이나 흥미가 없어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오는 등, 이래저래 수업 분위기가 여간 산만하지 않았다.

도떼기시장 같은 실기시간도 그렇지만 이론시간이라고 형편이 더 나아질 리 만무였다.

판서를 하고 설명을 하려면 주의집중이 잘 안 될 정도로 어수선했다.

그때마다 지휘봉으로 칠판을 탕탕 두드리거나 앞뒷면에 베니아판이 든 출석부로 교탁을 타탁 내리쳤다.

더러는 떠드는 녀석 면상을 정조준해 백묵을 곧장 날렸으며 더 화가 치밀면 칠판닦개를 냅다 두상 향해 집어던졌다.

그보다 더 성질이 났을 땐 앞으로 불러내 애꿎은 출석부로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치거나, 진짜 화산이 폭발하게 되면 다짜고짜 따귀부터 올려붙였다. (70년대 초라 통했지 요즘 세상엔 폭력교사로 구속감이겠군!)

하지만 키가 장승같이 큰 떡대들에게 그까짓 체벌 정도

야 가소로울 뿐, 자그마한 여선생의 매 타작쯤은 실실 웃음이나 쪼개게 만들었다.

애시당초 회초리 가지고는 아무 소용도 없고 완력 동원이 필요 없는 따귀를 때리면 그나마 남자 자존심에 모욕을 당한 듯 좀 수굿해지는 편이었다.

아무튼 수시로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본디 은방울 굴리는 목소리야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던 목소리가 탁해지며 중성화되고 말았다.

당시 나야 애기엄마이기 망정이지 또래 처녀선생들은 수업 도중에 다 큰 녀석들로부터 느물거리며 장난치는 히야까시(ひやかし)라고, 요즘으로 치면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우리 클래스 주임교수는 오십 중반의 여성으로 체중 듬직한 아이리쉬다.

그럼에도 음성은 소녀처럼 여리고 곱고 낮으막했다.


아니 아예 소곤거리듯 한다.

시끄러운 남미계 학생들이 다수라 안 그래도 퍽 소란스런 교실인데 선생님은 수업 중에 절대로 한 옥타브도 목소리를 더 높이는 적이 없다.

학생들이 떠들며 잡담을 하거나 설명하는데 주목을 하지 않고 어수선해지면 그녀는 하던 말을 딱 멈춘다.

그리곤 가만히 학생들을 쳐다본다.


조용히 주시만 하고 있어도 학생들이 눈치를 채고 서로 주의를 준다.

가끔은 스탑! 스탑! 두어 번 읊조리거나 입에 착~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학생들은 입도, 동작도, 어떤 여하한 움직임도 다 사라지며 조용히 가라앉게 된다.

결코 한 카리스마하는 분도 아니고 오히려 수더분한 인상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만의 수업방식에는 전체를 제압하는 외유내강의 힘이 있었다.

걸핏하면 버럭 고함을 치며 화를 내던 치졸스럽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내 젊은 날의 수업시간이 그녀의 교수법에 절로 대비돼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면 수업시간만이 아니라 고수(高手)의 숫법을 만사에 적용시켜 볼 일이다.

누군가 감정을 상하게 해 흙탕물 일어나면 흐려진 물이 침전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이성 잃고 떠드는 상대가 있으면 일체 아무 말없이 대응을 하지 말 것.

그녀의 고단수 교수법을 통해 여태껏의 내 방식들은 거개가 아랫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