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다 보면 묘한 아이러니와 접할 때가 많다. 광복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올 팔월. 우리에겐 빛을 되찾은 감격의 달이지만 일본인들에겐 원폭투하 80주년을 맞는 달이자 굴욕적인 패전의 달이기도 하다. 팔십 년 전 8월 6일 월요일 아침. 맑게 갠 하늘에 미 전폭기 B 29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세계2차대전의 막바지, 이미 도쿄 등 본토 주요 도시는 미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미 첩보당국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일본은 줄기차게 욱일승천기를 휘두르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재차 버섯구름이 솟았다. 일본은 그렇게 핵 공격을 초래한 것이다.
전쟁으로부터의 희생을 줄이고 종전을 앞당기려는 미국 측 결론은 핵무기 사용. 불과 3주 전 뉴 멕시코 사막에서 원폭 실험을 성공시킨 미국이었다. 그 폭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로 선정된 히로시마에 그날 아침 리틀보이는 투하됐다. 그때 비행기가 정조준한 곳은 도시를 가로지른 강 위의 다리, T자 모양의 상생교였다. 相生은 서로 어우러져 화합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잠시 후 강렬한 섬광과 함께 솟아오른 거대한 버섯구름. 주변 수 십 Km 이내에 있던 모든 것의 흔적이 지워졌고 방사선 낙진이 잿빛 비로 쏟아져 내렸다. 아비규환의 순간,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그 후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원자폭탄으로 평화 아닌 평화를 거저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가져다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 소 패권다툼의 산물로 남북이 분단되고 6.25를 거쳐 휴전선을 허리에 두른 채 전쟁재발이라는 악령에 시달려 온 우리다. 걸핏하면 북은 서울 불바다설을 호언장담하며 압박해 왔다. 게다가 수십 년 전부터는 북핵 문제로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딛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다. 한마디로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판국이 됐으니까.
복제인간 얘기인 영화 <아일랜드>가 미국에선 주목받지 못한 반면 한국에서는 최고의 외화로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여론의 돌팔매질로 내친 황우석 교수 영향이다. 핵개발을 다룬 오래전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뒤늦게 북한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도 한다. 당시 남북작가회의에 참석차 북한에 다녀온 문인들의 전언이 그랬다. 양쪽의 현상은 그 사회의 관심사 나아가 이슈를 민감하게 대변하고 있다. 북한 동포들도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그들의 염원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일까. 체제의 선전선동에 매몰된 일부 외의 대다수는 그게 아닐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목소리를 합하는 우리.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우리이고 그에 앞서 평화로운 공존이 우리의 소원이다.
북핵 문제와 관련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열린 몇 차례의 핵협상은 매번 도중에 결렬됐다. 핵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권리를 내세우는 북한. 어떠한 핵도 가질 수 없다는 미국. 비핵화 목표에는 인식을 같이하나 핵심 쟁점인 핵 프로그램 완전 폐기안에 결단을 유보한 북한. 비핵화에 따른 상응조치로 제시된 체제보장, 경제협력, 에너지 지원이다. 북한 주민의 기본적인 생활마저 위협당하는 피폐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건만 북이 그토록 핵에 집착하는 이유는 당연히 무소불위인 그 막강한 파워 때문이다. 두 차례나 북 김정은과 미 트럼프가 쇼맨쉽인지 협상에 긍정적 자세로 임해 상당한 의견의 접근을 보이기에 타협의 발판이 마련되려나 싶었는데 최종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막바지 조율에서 상충된 의견이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을 벌어 북측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핵탄두 35~100개를 보유한 것으로 핵전문가는 추정하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완성 단계로 분석된다.
과거 리비아가 순순히 핵을 포기한 것과는 달리, 이란은 핵 주권 포기를 강요한 유럽연합의 핵 타협안을 거부하며 세계적인 핵 군축 노력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로 얼마 전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초래한 이란. 이란의 핵 능력 수준이 본격적인 핵 무기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의 결정이었다. 양국의 난타전이 이어지자 트럼프는 이란의 핵시설을 직접 공격했다. 심장부에 타격을 받자 이란은 주춤했다. 그럼에도 휴전 직전까지 양측은 미사일 공방을 계속했으나 ’ 12일 전쟁’은 드디어 끝났다. 이란처럼 서방 각국은 물론 인도 파키스탄, 이미 북한까지 보유한 핵이다. 1970년에 발효된 핵확산 금지조약에 근거하나 형평상 문제로 따지자면 부당한 약속이다. 핵무기 보유국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으로 제한하고 다른 국가들은 하지 말라고?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통해 핵무력 증강에 총력을 다한 김정은이다. NPT에서도 진작에 탈퇴했다. 그렇다고 능력 갖춘 너도나도 핵 개발 경쟁에 뛰어든다면? <그날 이후>란 영화에서 보여준 핵전쟁의 가공스런 참상이 기다릴 뿐이다. 無로 돌아가는 인류의 역사, 지구의 마지막을 앞당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일본의 히로시마. 유일한 피폭국 일본 히로시마에는 평화기념 공원 ( Hiroshima's Peace Memorial Park)이 있다. 핵의 위력을 생생히 증언하는 처참한 몰골의 원폭 돔, 피폭자의 참상이 담긴 사진들이 모두에게 핵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호소한다. 비옵건대 앞으로는 이러한 비극의 씨를 뿌리는 자도, 이를 받는 자도 없게 하시어 먼 나라 가까운 이웃이 길이길이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이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비문의 일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