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되어

1997

by 무량화


주남지 갈대숲을 박차고 수만 마리 철새가 비상한다. 나래짓도 힘찬 가창오리 떼다. 만추의 진객이 펼치는 스펙터클한 군무. 순식간에 하늘을 덮는 경이롭고도 전율 어린 위용이야말로 가히 장관이다. 그처럼 힘차게 날고 싶다. 자유로이 솟구치고 싶다. 훨훨 걸림 없이 날아보고 싶다. 바람 가르며 벽공 저 높이까지 푸르게 푸르게 날아오르고 싶다.


경주박물관 뜰에 가면 에밀레종을 볼 수 있다. 천년 세월의 무게를 의연히 감당해 온 종신이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종소리는 들을 수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에밀레종소리를 제야에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타종이 금지된 때문이다. 노래를 잃은 새. 날기를 멈춘 새. 박제된 새의 눈빛은 무기력하다. 어둠의 틀을 깨고 나올 때, 갇힌 창을 열어젖힐 때, 비로소 살아있음의 싱그러운 피돌기는 이루어지리니.


날아올라야 한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소리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갈망한다. 시방세계 널리 울려 퍼질 수 있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미술품으로서의 감상 대상이 아니라 종은 소리를 낼 때 정녕 생명이거늘. 허나 안타깝게도 에밀레종은 속절없이 갇힌 소리, 울지 못하는 울음이 되었다.


체념은 달관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하였지만 그 경지는 아무래도 나의 몫이 아니다. 문득 소리치고 싶다. 나는 날고 싶다. 이대로 침묵하다가는 마침내 터져 버리고 말 것 같다. 무겁게 짓누르는 적막에 질식할 것 같다. 조각 져 부서지고 말지라도 갑갑한 속내 열어 목청껏 소리치고 싶다. 마음껏 날아보고 싶다. 이 간절함을 어이하리.



불교문화가 찬연히 꽃 피웠던 신라시대. 국가적 불사로 이루어진 범종 제작이었다. 종이 된 어느 날. 한낱 쇠붙이에게도 혼이 주어졌다. 천하를 제압할 듯 우렁찬 반면 보름달빛보다 더 은은하면서도 멀리 여울지는 종소리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선고의 유덕을 기리고자 만들었다는 성덕대왕 신종. 봉덕사에 안치했기에 봉덕사종이라 불리는 국보 29호다.


현존하는 종 중에 규모가 최대인 데다 종신에 제작 연대와 주종 의도 등을 양각으로 새겼다. 무엇보다 화려 섬세한 조각 양식이 돋보이는 종. 자연의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한국미의 전형이라는 우리 범종 가운데서도 선과 형이 빼어난 에밀레 종이다. 특히 종소리의 파장과 진폭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오묘하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비밀이 풀리지 않는다는 불가사의 그 자체다.


종의 생명은 맥놀이에 있다. 끊어질듯하다가 되살아나는 길고도 아득한 여운이 맥놀이다. 영원으로 이어질 것 같은 그 소리. 장중하면서도 그윽한 데다 깊고도 아스라한 울림, 에밀레.... 수차의 실패 끝에 한 아기의 영혼이 공양물로 바쳐지며 탄생된 에밀레종. 전설이 그럴싸해서인지 어미를 부르듯 애끓는 소리. 시큰하도록 절절히 가슴 헤집어 대는 소리다.


애절한가 하면 심오하고, 장엄한가 하면 신비스러운 에밀레종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무심한 듯 유정해서 심금에 파문 일구고는 허공 저 멀리로 스러져 가는 종소리. 새벽 어스름 재를 넘고 놀이 잠긴 강을 건너 무한 공간으로 스며드는 유현한 그 종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한의 정서를 지닌 민족이라서일까. 정선 아리랑 가락에 곧잘 취하는 심성과 같은 맥락인지, 결결의 비감이 오히려 아름다운 그 종소리.



지난겨울. 눈길 미끄러운 계룡산 어귀 기념품 가게에서다. 나는 큰애에게 아파트 현관에 매달라며 맑은 소리가 나는 풍경을 사 주었다. 그때 큰애는 에밀레종을 본뜬 작은 동종을 내게 안겨줬다. 종을 받아 들고 오며 흐뭇했다. 언제라도 가까이할 수 있는 나만의 종소리를 갖게 됐으므로. 비록 원래의 범종이 갖는 그윽한 울림이야 어림없지만 투명한 청음은 하냥 듣고 들어도 좋다.


용머리에 매달린 종에는 돋을무늬로 새겨진 비천상이며 보상화문이 그럴싸하다. 천의 날리면서 구름 위에 무릎 꿇고 경건히 합장 공양 올리는 비천상은 연화세계로의 환생을 꿈꾼 신라인의 모습인가. 그보다는 천상으로 울려 퍼지길 소망한 종소리의 간곡한 염원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을까.


날으리라. 양 날개 활짝 펴고 날아오르리. 아직도 종이 간직한 소망은 비천. 창공 드높이 솟아올라 기류를 타는 새되어 자유로이 나는 것이다. 대기 마음껏 호흡하며 넓고 너른 세상을 유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있음을 가슴 벅찬 은혜로 느껴보고자 한다. 온 누리에 여울지는 종소리 되어 나는 상기도 비천을 꿈꾸노니.


그간 길들여진 순명의 안일을 거부하는 몸짓이듯, 평화로운 호심 향해 훠이~ 손사래질을 해 본다. 순간, 떼 지어 철새 무리가 날아오른다. 동천을 가득 메운 수많은 종소리의 파편, 파편들. 끝 간 데 없이 자유로운 넋. 이윽고 노을 속으로 잠긴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