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강원도 인제는 요즘의 내게 의미가 각별한 지역이다. 큰애가 거기에서 이태째 군 복무를 하는 연고로 자연히 나의 강원도 나들이가 잦다. 지난 구월 하순, 마침 닿고 보니 가로의 현수막과 청사초롱이 14회째를 맞는다는 합강문화제를 알린다.
심심산골 강원도, 그중에도 궁벽진 오지인 인제에는 소양강 상류가 되는 합강이 도도히 흐른다. 원통골 감아 돌아 흘러온 강줄기와 내린천 거친 물살이 한데 어우러진 합강. 내설악 외설악을 휘감으며 각각 흘러내린 옥수가 하나로 합류되는 지점부터 강 이름은 합강이 된다. 거기에서 비롯된 지역축제인 합강문화제.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박인환 시인 추모 백일장이다.
의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한 시인. 다분히 서구풍인 예술 감각에다 모더니즘의 기수로 도시적 서정시를 쓴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시인이 이리도 외진 산촌 인제 태생이라는 게 뜻밖이다 싶을 정도다. 하긴 시인의 정서를 살찌우기에 더없이 좋은 자연환경이다. 이처럼 수려한 산수에 둘러싸여 산다면 누군들 시인이 아니 될까,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인제다. 의외라는 것은, 강한 도회 풍 이미지로 인식되는 시인인 만치 인제와는 연결 그림이 언뜻 잡히지 않아서이다. 이처럼 대입이 쉽지 않음은 물론 군 작전지라는 지역적 특수성도 한몫 거든다.
여러 궁금증에 기어이 시비를 찾아 나선다. 합강 다리 못 미쳐 합강정 소공원에 오르면 그의 시비를 만날 수 있다고 문화원 직원이 방향을 짚어 준다. 합강정의 유래도 곁들여 듣는다. 조선조 숙종 때 당시 인제 현감이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 중앙에 해당되는 자리에다 정자를 세워 매년 국태민안을 비는 제례를 올렸다는 곳이 합강정이다. 그 후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근자 들어 새로이 복원시켜 놓았다고 한다.
아직도 공원 조경 공사가 진행 중이라 을씨년스러운 주변. 황량감마저 일게 하는 흙먼지 사이로 단청 산뜻한 정자가 시선 가득 들어선다. 연달아 우뚝한 시비가 보인다. 그러나 인근 부대 사격 연습장에서 쉴 새 없이 들리는 총소리 포소리가 잔뜩 겁을 먹게 한다. 그 소리에 익숙해 있을 길가 구절초 꽃도 지질린 낯빛이긴 마찬가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시 <세월이 가면>이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 시비. 기단부 석판에 간단명료히 약력이 새겨져 있다. 1926년 인제 상동리 출생. 평양의전 다니다 46년 시인 데뷔, 51년 경향신문 종군기자 지내고 56년 몰. 겨우 서른, 평범한 사람이었을지라도 너무 짧아 아쉬운 한생이다. 왼편에는 조병화 시인의 헌시가 적혀 있다. ‘천재는 요절하는 것인가… 섬광처럼 시를 뿌리다 순간처럼 사라진 그대. 아, 얼마나 강렬한 생존이었던가.’
비장감에 잠시 떨구었던 고개를 들게 하는 건 저 아래 합강 삼거리의 소음. 도로를 질주하는 군용 트럭과 지프차가 특수 지역임을 실감케 하는 반면, 가을 행락 시즌답게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다. 설악산 들머리라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긴 하나 여기 박인환 시비가 굽어보고 있음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시비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산악훈련을 마치고 귀대라는 일단의 병사들 행렬이 마음을 애틋하게 한다. 국방의무를 수행 중인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휴전선에 이상 징후가 조금만 나타나도 바짝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게 자식 군대 보낸 부모 심정이거늘. 나뭇가지 꽂은 철모에 검게 칠한 얼굴, 후줄근히 젖은 바지에 흙투성이 군화, 무겁게 짊어진 배낭과 비껴든 총신을 보면 절로 기분이 착잡해진다.
그간 우리가 누려온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였던가. 실제 몇 킬로미터 저쪽에는 전쟁 준비 완료라는 구호를 외치며 인공위성인지 미사일인지를 쏘아 올리는, 이념 체제가 극명히 다른 무리들이 포진하고 있다. 정전 혹은 휴전 중인 준전시의 현 상황. 거기에다 국제통화기금을 빌려 쓰는 국가 부도 직전의 한심한 현실이다. 하지만 정치꾼들은 산적한 민생문제는 뒷전인 채, 역대 정권의 복사판이듯 반대편 잡는 사정에 바쁘다.
그 서울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 인제에 오면, 예사로운 포소리와 군용차 대열에 현지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살아들 가지만 이처럼 전쟁의 위기의식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내 가슴은 잔뜩 조여 오는데. 언제쯤 이 땅에 전쟁 걱정이 없는 참 평화가 정착되려는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인제를 군 주둔지 아닌, 시인 박인환의 고향으로 기억하게 될는지.
<검은 강>이라는 박인환 시인의 시는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를 고발한 50년대 시다.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한/ 생과 사의 경지로 떠난다/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이 시가 쓰인 지 어언 반세기. 합강변의 수많은 막사 안에서 시인의 나이쯤인 젊은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더러는 하던 일을 접어 둔 채 청춘의 한 시절을 인내하고 있다. 혈기 넘치는 청년기, 가장 아름답고도 빛나는 시기를 고스란히 압류당한 채로. 말없이 굽어보는 저 시비인들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있을까. 더구나 그 시인의 고향에 여태도 포연과 총성이 이어지고 있음 또한 안타까운 노릇이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