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지?

by 무량화



글쓰기에 갓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80년대 초. 체계적인 글공부는커녕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만한 곳이 전무했던 당시다. 습작이 쌓여도 첨삭지도는 고사하고 조언 한마디 들을 곳이 없었다. 그저 내 나름대로 쓰고 또 쓰며 여기저기 투고한 뒤 게재되면 서평 한 두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기본 바탕도 다져지지 않은 데다 길잡이도 없이 맘 내키는 대로 마구 쓰다 보니 글꼴도 못 갖춘 풋내 나는 글. 그럼에도 가끔은 내 글에다 수필이니 시조 대접을 해주는 곳이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혼자 문장독본 읽어가며 수없이 밑줄 그었으나 그걸로 글공부가 충분할 리 없었다. 도서관을 일삼아 찾았다. 책을 읽고 나면 거의 독후감을 써 정리해 두었다. 제멋대로 자유분방하던 글, 조악하기 그지없던 글이 차츰 틀을 잡아가며 다듬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


이른 결혼으로 삼십 초입에 나는 이미 사추기였다. 덕분에 그때부터 글쓰기에 빠지게 되었다. 규칙적으로 일기를 쓴다거나 일정 형식에 따른 글을 계산하고 쓴 적은 없지만, 아무튼 낙서 끄적거리듯 짤막한 글 같은 걸 즐겨 써왔다. 생활 속의 단상들을 간간이 메모해 두었다가 오죽잖은 그 편린들을 짜 모아 노트에 정리해 놓기도 했다. 그렇게 글과 나는 별 부담 없이 만났다. 흉허물 없는 친구 같고 스스럼없는 가족같이 편안한 관계로. 대학에서 문학공부를 받은 바 없다 보니 기초가 없는 사상누각이랄까. 어디까지나 자아도취에 빠진 주부의 신변잡기에 다름아닌 글들이었다. 그러나 가령 처음부터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나 목표가 분명했다면 애당초 나는 아마도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터이다. 과단성 있게 일을 추진해 내는 끈질긴 성품도 아니고 뛰어난 의지력과도 거리가 뜬 자신이므로.



이름이야 무엇이든 모양새가 어떠하든 목적이야 있든 없든 그 작업은 나를 매료시켰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글을 쓰는 순간의 열락(悅樂)이었으니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출하는 기(氣)에 밀려서 쓰고, 쓴다는 그 자체가 좋고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글. 그만큼 쓰고 싶다는 욕구가 늘 충일했다. 중독일 정도로 글 쓰는 그 순간을 즐겼으며 때때로 거기서 기막힌 엑스터시마저 느끼곤 했다. 속에서 이글거리며 터져 나오고 싶어 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 속내 후련히 풀어헤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으니, 익명의 자유를 한껏 누리며 나는 쓰고 또 써서 신문과 잡지 독자투고란에 보냈다. 그득 차서 넘치는 데야 쓰지 않고는 못 견딜 노릇 아닌가. 그러나 다작(多作)은, 글의 남발은 분명 자랑거리가 못된다. 한 편 한 편에 신중을 기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발표하기보다 설익고 여과되지 않은 채로 마구잡이 방류하는 식은 지양되어야 함에도 나는 늘 그러하다. 하지만 새삼 뭐 가로 늦게 늘 하던 버릇 쉬 바뀔까.



흔히 문학은 뼈를 깎는 고행이며 통렬한 가슴앓이라고들 하는데 너무 안이한 자세로 글을 써온 나. 하지만 내게 있어 글쓰기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도, 각고의 아픔도 아닌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향락일 따름이다. 전문 작가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그만한 그릇이 못 되는 나로서는 호모 루덴스로 충분히 만족하며 스스로 딜레탕트라 여긴다. 아무렴 어떠랴. 어느 분야나 전문 프로페셔널은 얼마든지 있다. 꼭 무엇이 되고야 말겠다는 작정보다는 각양각색이고도 다기다양한 저마다의 취미세계를 좀 더 확장시켜 삶을 보다 윤기롭고 향기롭게 만드는 차원에서의 행복한 도락이면 족한 것을. 글쓰기는 자기 정리다. 자기 정화다.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는 작업이고 흐려진 심안을 맑히는 작업이다. 또한 글은 한편의 참회기도이자 성찰일기이다. 때로는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고 감정의 분출구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인식의 굴레, 나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 자유로울 수 있음이 좋다. 현실과 의식의 괴리, 그 혼돈과 갈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잠시일 망정 얼마나 큰 은총인지.



마음속 깊숙이 담고 있는 여러 감정들을 다듬고 순화시켜 표현해 내는 글쓰기. 캐슬린 애덤스는 현대인의 불안을 다스리는 훌륭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들었다. 글을 쓰므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가닥이 잡히며, 경험한 일에 대해 쓰다 보면 그 경험으로 인한 충격을 둔화시키는 효과도 가져온다는 사례들을 근거로 들어 설명했다. 작가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절망적인 체험 등 마음의 상처를 언어로 고백하는 순간 나쁜 기운이 발산되어 심신건강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나아가 생리학적 증거로는 글쓰기 덕에 혈액 내 질병을 막아주는 림프구가 증가했으며 혈압을 다소 낮출 수 있었다고도 했다. 루이스 디셀보는 자신의 병에 대한 글을 쓰다가 실제 그 병이 호전되기도 하는 등 정신적 육체적 치유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것, 자기 자신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감정은 말로 쏟아놓으면 대부분 덧없이 흩어지지만 글로 표현하면 비로소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런 감정의 객관화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감정이 정리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마지막 자유이고 최후의 권능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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