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6코스에서 저녁놀 즐기며

by 무량화

마사이족이나 마찬가지로 걷기는 일상이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걷기 운동이란 단어로 발전되면서 카미노길에 사람들이 몰리더니 제주 올레길도 열렸다.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역마다 명칭도 그럴싸하게 내건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느 트레일을 걷거나 차 길이 아닌 담엔 맘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기에 호응도도 높다.

무엇에도 구애받는 것 없으므로 기분 가볍게 휘적휘적 또는 뚜벅뚜벅 걷는다.

제주 올레를 걷는다는 것도 자유여행이기에 저마다 끌리는지도 모른다.

틀에 짜여진 공식이나 원칙대로 따라 걸을 필요는 없으나 안전 수칙과 기본예절은 지킨다.

스물한 개나 되는 올레코스를 순서대로, 성문영어 떼듯 차근차근 정석을 밟는 모범생도 있겠지만 글쎄다.

이 역시도 내 경우는 상황에 따르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다.

차근히 준비해 둔 계획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산티아고 걸으면서 정보 검색하거나 사전 예약제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이쯤 살아보니 삶의 노정이나 길 위에서의 여정이나 계획한 대로 풀리지만은 않더라는 걸 이미 체득하게 됐다.

거기다가 나이에 따른 근거 없는 뱃장도 생긴 데다 아날로그 세대다운 느긋함으로 제대로 즐긴 카미노길.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 누리며 오로지 내 뜻대로 운영하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귀로에서조차 시간에 쫓기지 않으려 암트랙이건 버스건 예약하지 않고 가서 맞닥뜨리는 대로 타자는 주의였다.

한 달간 아무런 사고 없이, 이를테면 발에 물집 한번 생기지 않았으며 시행착오에 의한 낭패 겪지 않고 무탈하게 귀국했다.

하물며 말 통하고 글 훤한 한국에서야 곤란에 빠지는 실수나 제약이 뭬 생길 수 있으랴.

다만 혼자서 걷기는 후미져 어쩐지 부담스러이 느끼던 차, 하늘은 좋은 도반을 예비해 두셨다.



서귀포에 와서 처음 인연 닿은 헬레나 씨와 그렇게 6코스 길을 걸었다.

그는 들꽃이나 나무 이름을 잘 알았고 사진에 정진한 이력도 깊었으며 시를 공부한 터라 서로 코드가 잘 맞았다.

더구나 같은 충청인이고 식성마저 엇비슷하나 주중에 두어 번은 꼭 필드에 나가는 것 빼고는 꼭 닮은 자매 같다.

오 년째 제주살이 중이라 그는 이미 다 둘러본 길이기에 어디에 맛집이 숨어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도 알려준다.

이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동안 줄곧 우리는 서귀포 바다를 끼고 새로운 풍경 속으로 나아갔다.

일기 화창하고 해풍 부드러워 마치 봄날 같았으나 한라산 정상 흰 눈은 청량음료처럼 싸했다.


그때 해송 그윽한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마치 천상의 멜로디처럼 평화로이 들려왔고.

낭떠러지 해벽 지나자 바람 든 무처럼 구멍 숭숭 난 화산석 깔린 검은여와 소천지 지나면 보목포구.


서귀포 시인 한기팔의 자리물회 시비가 기다린다.


시비 앞에서 눈으로 음미하는 자리물회.



자리물회 ㅡ한기팔


.......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먼 마을 불빛이나 바라보며

하루의 평화를 나누는

가장 소박한 음식,

삶의 참뜻을 아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한라산 쇠주에

자리물회 한 그릇이면

함부로 외로울 수도 없는

우리들 농사치들이야

흥그러워지는 것을.

...........


우리 모두는 고향의 그런 맛, 향수 어린 엄마의 손맛 한둘씩 간직하고 사느니....

하여 시인의 삶을 읽으면서 맞아! 몇 번이나 고개 주억거렸다.


우리는 마침내 흑임자 알갱이 쏟아놓은 듯한 자갈밭과 모래알 위로 파도 거듭거듭 밀려드는 검은모래 해변에 닿았다.

이 코스에는 서귀포의 명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기에 지루할 틈 없이 눈과 귀 즐겁다.

이중섭거리-솔동산-정방폭포-소천지-구두미 포구- 보목항- 제지기 오름 - 쇠소깍까지의 길.

다채로운 문화가 있고 시원스러운 폭포가 있고 물빛 고운 소가 있고 숲 오솔길이 있고 아담한 포구가 있고 작은 오름이 있고.

청남빛 바다에 뜬 문섬 새섬 지귀도 거느린 채 걷노라면 누항사야 진작에 잊히고 진시황이 탐한 불로초 오감으로 꼭꼭 씹게 된다.

헬레나 씨는 때론 올레길 가이드로, 숲해설사로, 제주역사 강의에 운전까지 도맡아 수시로 나를 감동 먹게 했다.

지역 문화행사 소식은 물론 렌터카에 달린다는 ㅎ자 든 번호판을 찻길에서 주의하라는 조언부터 하다못해 맛난 감귤 고르는 법도 그에게 배웠다.


겨울 제주를 상징하는 붉은 열매 먼나무 가로와 계절 잊게 하는 야자수길도 그와 함께 도란도란 걸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지귀도, 연보랏빛 해국과 윤기 나는 작은 이파리 까끄레기 사스레피와도 친해졌다.

그녀로 인해 날마다 좋은 날에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었으며 따라서 포스팅감은 매일 풍성해지고.....

정오부터 걷기 시작해 노을져 어둠살 내릴 무렵 시내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