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 성지에서 정결한 선셋을

2021

by 무량화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일출 풍경으로는 심심하겠지만 쾌청한 기상은 예약된 셈이다.

더 이상 짙푸를 수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우리는 용수성지에 가 있었다.


어둠 밝히는 등대 모양 종탑이 인상적인 성당과, 배를 상징하는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이 청청한 하늘 배경으로 서있었다.

제주 선교 백 주년 기념으로 학계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라파엘 호의 구조를 확인하고 150여 년 전 선박을 복원해 만든 라파엘호.

정원 한켠에 라파엘호 닻을 내린 그 옆 야자수 사이에는 자애의 성모상이 거친 바다 항해하는 모든 이 따사로이 품어 안아줬다.

성당에 올라가 오늘 이 자리에 불러주신 성인을 기리며, 새로운 인연 섭리하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바쳤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장소다.

열세 명의 일행과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던 중 당도한 용수리 해안.

고국 땅에 닿은 감격 어린 첫 미사를 용수리 해안에서 봉헌하고 배를 수리한 후 포구를 떠나 금강 하류 나바위로 상륙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경기도 용인에서 사목을 했는데 이듬해 체포되어 스물다섯 나이에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노르스름한 저녁노을이 어렸다.

잠시 후면 석양이 질 터였다.

용수리 바닷가로 나왔다.

섬과 섬 사이로 진다는 낙조를 기다렸다.

하필이면 그때 폰 배터리가 바닥났다.

도중에 들른 문화예술인 마을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과하게 찍었던 모양이다.

근처 카페에서 따끈한 차를 주문하고는 급한 대로 잠깐 충전을 시켰다.

해는 점점 바다 가까이로 내려왔다.

곧 수평선에 닿을듯했다.

후다닥 밖으로 나와 가까스로 스러지는 해와 송별했다.

순간의 일이었다.

서서히 이내빛 누리에 퍼졌다.



서귀포로 가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마악 서해 너머로 해를 전송하고 돌아섰는데 불그레한 여명 사이로 동쪽 하늘에 달이 희미하게 떠있었다.

구름 전혀 없건만 엊저녁에 본 둥근달이 왜 빛을 잃었을까?

꼽아보니 음력으로 오늘은 시월 보름날, 휘영청 밝아야 할 달이 어쩐 일이지?


월식이 있는 줄 몰랐는데 달의 변화를 보니 월식 현상과 아주 흡사했다.



죽 지켜보는 동안 아랫부분부터 모습 드러나며 초승달처럼 보였다가 점차 달이 차올라 원만 무애 한 보름달이 되었다.

폰 기능이 정지돼 월식 여부도 알 수 없었고 달 사진 역시 찍을 수 없었지만 별빛 초롱한 청남빛 밤하늘만으로도 감사 충만.

거처에 도착하자 얼른 컴퓨터부터 열고 검색을 해보았다.

올해 마지막 우주 쇼인 부분월식이 있었는데 기상여건으로 제주도에서만 육안으로 명료하게 관측할 수가 있었다고.


아쉽게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대신 두 시간 넘게. 차에 흔들거리며 귀가하는 내내 영문도 모른 채 달에 시선을 집중하긴 했다.

옛사람들은 월식이 닥치면 공포감과 불안을 느끼기 충분했으니 이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상이기에 두려웠을 터.

과학시대가 되자 월식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 안에 들어오는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허나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이 일어날 때의 그림자가 지구의 그림자로, 이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 했다.

이후 그리스의 한 천문학자는 월식으로 달->지구->태양 차례로 덩치가 크다는 걸 계산해 냈으며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창하였다.

뜻밖에 조우한 이번 월식은 부분 월식이지만 달 표면 거의 전부인 97.8%가량을 가리므로 개기월식과 비슷하게 보였다 한다.

4시 18분께부터 시작된 월식이 지구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 종료된 시각은 7시 47분께.

세 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이번 월식은 특히 580년 만에 나타난 가장 긴 월식이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도중에 뒤늦게 주목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차지게 특별 이벤트인 월식 구경 잘했다.

오늘은 일출부터 시작해 일몰에 더해 월식까지, 그것도 몇백 년 만에 보는 진기한 우주쇼를 접했으니 이런 축복 그저 황감스럴 뿐! 2021



이튿날 조선일보 기사에서 빌린 사진으로, 당일 오후 여섯 시경에 올려다보았던 달이 꼭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