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수 흐르는 삼양 검은 모래 해변

by 무량화


제주시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오후 여백 공간은 삼양해변에서 보냈다.

지난해. 딸내미가 이십 수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아들이 하루 먼저 와 아침 일찍 동생을 맞으러 공항으로 나갔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온 딸내미는 별로 피곤한 기색도 없이 한국에서의 첫 식사를 제주시내에서 맛지게 먹었다.

우리는 동쪽 해안을 따라 월정바다며 성산일출봉에 들렀다가 서귀포로 가기로 했다.

짧은 일정으로 귀국한 터라 돌아갈 때는 서쪽해안을 타고 명소 훑으며 공항에 가면 그나마 제주 한바퀴는 도는 셈.

이날 첫 번째로 차를 멈춘 곳은 삼양해변이었다.

곧 비가 쏟아질 기세로 잔뜩 흐린 날씨라 바다는 매우 우중충했다.

그래도 해변을 걸으며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해진 다리 근육을 풀어주려는 오빠 나름의 배려일 터였다.

해풍까지 거센 을씨년스러운 일기라 우리 외엔 텅 비다시피 한 검은 모래해변.

날씨와 상관없이 오랜만에 아들 딸과 함께 바닷가 걷노라니 엄마는 마냥 행복했다.

자녀들과 가까이 사는 것도 좋지만 이처럼 바다 건너 멀찍 멀찍 떨어져 살다가 한번씩 만나면 더 반갑고 흠흠하니 좋다.

사실 전반적으로 건강체인 부모이기 망정이지 만일 노약한 부모라면 어느 자식이 홀로 지내겠다고 나서는 엄마를 용인하겠는가.

아무리 자신 있고도 당당하게 자립을 선언한들 이런 경우를 편편히 보아 넘길 요즘 애들인가.

보수적이기만 하던 남편 또한 지금은 홀로 지내는 게 외려 익숙해져, 옆에서 쪼아대며 간섭하지 않으니 만고 편하다고 한다.

완고한 그가 나의 자주적 삶을 기꺼이든 마지못해서든 인정해 준 것만도 경천동지 할 변모가 아닌가.

그처럼 변하지 않고는 피차 공존하기 어려운 시대다.

자녀들이 중년에 이르니 이제는 전처럼 녹록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자식이라도 어려울 때가 있다.

수평관계 그 이하로 위상이 뒤바뀐 감도 드는 이제는

전과 달리 가르치기 보다 귀를 더 열어두고 산다.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지구촌이라 어지러울 지경인 세태 따라잡기가 시니어들은 솔직히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그와 같이 세상 풍속도 하루 다르게 변하고 있다.

덕분에 내가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던 것.

내 평생에 이리 자유 만끽하며 평화로운 독립생활을 해보리란 기대를 언감생심 꿈이라도 꿔봤던가.

보너스처럼 아니 선물처럼, 그보다는 축복처럼 누리게 된 제주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충만 그 자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알맞을 만큼의 행복감 속에서 지낸 4년간, 이제 눈을 감는다 해도 아무런 회한이 없겠다.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말씀처럼.

그날, 썬득함에 절로 웅크려지던 차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해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랐지.

딸내미가 한국 가면 꼭 먹고 오겠다며 미리 검색해 둔 쟁반회국수 명가인 해녀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때와 달리 오늘은 아주 청명한 하늘.

삼양해변에서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며 맨발로 모랫길을 걸었다.

고운 모래 알갱이로 다져진 물가는 찹찹하면서도 서늘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자 간지럼 치며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살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바다에 서서 수영을 하거나 파도를 타는 청년들을 이윽이 바라만 봐도 시원했다.

먼바다에 화물선이 정물처럼 떠있었다.

물에서 나와 해변 양 끝을 왕복으로 왔다 갔다 하며 오래도록 걷고 또 걸었다.

푹푹 빠지는 모래가 아니라서 한참을 걸었어도 발이 편안했다.

한낮 볕살 따가워 모자를 벗어서 부채질하며 목덜미가 화끈거릴 때까지 걸었다.

흐르는 용천수에 발을 씻고는 이번엔 근처 용천샘 탐방에 나섰다.



전에도 싱거이 돌아봤던 대로 삼양동 용천샘은 서너 개뿐이다.

샛다리물, 엉덕알물, 큰 물 남탕과 여탕이 전부다.

그것도 모리모리 모여있어서 따로이 탐방로 안내판도 없다.

다만 돌담 겹겹으로 두른 작은 포구와 바닷가 시비는 볼만했다.

제주시에 있는 용천샘 중에 조천이 그런대로 정비를 잘해놨다.

용천수길 따라 만들어진 탐방로는 조천마을이 숫자로 보나 규모로 보나 역시 최고다.

이번엔 원당봉 아래 해바른 양지쪽에 위치한 삼양동 선사 유적지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