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댁 아마나스(하귤) 농원에서 전지 일을 돕다가 코에 스며드는 풋풋한 내음에 무뚝 떠오른 이름, 아~ 나쓰 미깡.
중학생 때였으니 육십여 년이 지난 세월 저편이다.
그간 하얗게 잊고 지낸 나쓰 미깡이란 단어가, 웃자란 아마나스 줄기를 자르는 순간 입에서 홀연 흘러나왔다.
향이 일깨워준 옛 기억.
아버지는 우리 자매에게 온실 화분에 물을 주라고는 했으나 절대로 전지가위는 만지지 못하게 했다.
화초분을 다듬는 일은 아버지만 했기에 전지작업은 항상 아버지 몫이었다.
제라늄은 스치기만 해도 역한 내음이 났지만 나쓰미깡 나무는 가지를 자를 때 화한 느낌의 싱그러운 향을 풍겼다.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독특한 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대 초 충청도에선 귤이란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유자가 나는 남해라면 모를까 밀감 구경을 한 적이 없다 보니 그 상큼한 향을 알리가 있으랴.
탱자나무는 있었으나 긴 가시로 무장한 터라 탱자 열매가 노랗게 익어도 딸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나쓰미깡 나무는 대처에서 사 올 때부터 얼추 내 허리춤에 이를 만큼 키가 컸으며 미깡이라 불리는 큼지막하면서 노란 열매가 두 개 달려 있었다.
겨울이 지나자 열매가 제풀에 떨어져 있어도 진저리 쳐지게 시고도 쌉싸레한 맛이 낯설어 먹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전지된 가지는 향이 좋아 화병에 꽂아두고 잎새를 비벼보곤 했던 일도 상기가 됐다.
아마나스를 가꾸는 한편에 쥔장은 양애 울금 호박 오이 고추 대파도 심었다.
마나님이 도회지 사람이라 수확한 농산물을 가져가도 별로 반기지 않는데 쥔장은 무엇하러 꾸역꾸역 채소를 심을까.
전원생활을 꿈꾸며 제주에 사둔 농경지를 맹탕 놀릴 수 없어서?
은퇴 후 처음 얼마간은 소꿉놀이에 다름 아닌 텃밭 규모의 농사짓기에 신명이 올랐으리라.
해가 갈수록 그러나 재미가 줄어들었다.
수고에 비해 수익도 거의 안 나는 노역, 수확물 친지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번거로웠다.
투기꾼도 아니면서 암튼지간, 내용 잘은 모르지만 덜커덩 계약을 하고 사들인 부동산이 지금은 애물단지.
그러나 땅. 토지는 한국인에게 있어선 굳은 심지 내지는 신앙과 같다.
사실 흙만큼 정직한 게 어디 있을까.
땀 흘려 씨 뿌리고 가꾼만치 몇 곱으로 되돌려 주는 게 자연의 섭리다.
본디 농투성이가 아니라도 농촌 출신은 빈 땅을 보면 그냥 못 본 척 내버려 두기가 어렵다.
실제 텃밭농사를 지어보면 거기 폭 빠질만치 재미가 진진하기도 하다.
씨 뿌려두면 고물고물 싹 올라오고 움쑥 키 돋으며 가지 벌어 소담하게 포기 이루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매일아침 탄성이 터진다.
그래서였으리라.
때맞춰 고추 모종 사다가 심어 아기 돌보듯 하고, 조석으로 물 주고, 잡풀 뽑아주고, 지줏대 세워 줄기 반듯이 자리 잡아주면, 별같이 이쁜 고추꽃이 피고,
초록색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무 배추씨앗을 뿌리려고 고춧대를 뽑아내는데 일손 도와주면서 고춧잎도 따왔다.
천상 촌사람이라서인지 데쳐 말린 시래기며 고춧잎이나 고구마줄기 등속을 갈무려 두는 게 내 취미다.
데친 고춧잎을 꼭 짜서 기본양념만 넣고 무친 깔끔한 반찬은 옛 입맛을 일깨워 밥 한 공기 금세 비우게 한다.
엄지와 검지 손톱밑이 시커멓도록 비닐봉지 한가득 훑어온 고춧잎.
거기 딸려왔지 싶다.
그럴 테지.
12층까지 무슨 재주로 귀뚜라미가 올라올 수 있으랴.
그렇게 퍼즐을 맞추자 비로소 납득되고 설명되고 정리되는 상황이다.
영화를 보다가 자려고 불을 끈 한밤중.
뒷방에서 느닷없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또르르똘똘.... 똘똘 또르르르....
뭐야~환청인가? 이명인가?
겁도 나면서 그만 잠이 확 달아나 버린다.
소리가 나는 향방을 따라가자 분명 뒷방 옷장 근처에서 난다.
녹음을 하려 전화기를 켜고 살그머니 옷장 가까이 다가서자 소리가 딱 멎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믿기지가 않았다.
귀뚜리가 이 높은 데를 올라온다는 게.
설핏 무섬증이 인다.
꿈이야, 생시야, 대체 이 무슨 변고고.
늦은 시각이지만 이대로 잠이 올 거 같지 않다.
염치 불고하고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소리 들리지 않느냐고 묻자마자 귀뚜라미 소린데 이 밤에 어딜 돌아다니냔다.
방에서 이 소리가 난다니까 설마? 의아해한다.
그렇다면 이명도 환청도 아닌 초추(初秋)의 선물인 게 분명하다.
반갑고 고맙구나, 가을의 전령사 귀뚜리여.
영롱하게 이어지는 소리 그칠 기미가 안 보이니, 우리 함께 가을의 정취 밤새 즐겨보자꾸나.
이리 친히 빈객(賓客) 찾아와 가을 소나타를 들려주다니 오늘도 하늘의 축복 넘치나이다.
그러나.... 뭘 먹인다?
이슬만 먹고 산다는 말은 귀뚜라미의 청아한 소리 때문에 생긴 시적인 표현일 테고 분명 생물이니 물과 곤충 나름의 먹이가 필요할 터.
검색을 하자 물그릇을 놓아주고 브로콜리 같은 야채를 주란다.
얕은 접시에 물도 조금, 야채 쪽도 놔뒀다.
뉴저지 살 적에 경험한 바로는, 가을이 되면 특히 달밤에 귀뚜라미는 다투어 수영장으로 점프해 익사하곤 했다.
달빛이 만드는 윤슬을 빛으로 착각한 때문이란 건 뒤에사 알았지만 암튼 아침마다 수영장에 뜬 낙엽과 귀뚜리를 뜰채로 건져내는 게 내 일과였다.
뒷방 가구 틈 어딘가에 숨은 녀석은 한번도 모습 드러내지도, 도통 먹는 거 같지도 않았다.
사흘이 지나자 영롱한 귀뚜라미 소리는 끊겼다.
명을 다했지 싶다.
우리 인연도 그리 허망히 끝났다.
영원까지야 언감생심이지만 고작 단 사흘 허락된 채 마무리된 짧은 연(緣).
아쉽지 않을 리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것이니 부여잡을 수야 없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길 수 있다는 인과법은 무섭도록 자명하다.
청량한 귀뚜라미 노래를 들으며 좋아라 행복해했다면 노래가 사라진 뒤의 허탈감이라는 고(苦)도 감수해야 하는 것.
불가에서는 살면서 이 여덟 가지를 경계하라 일렀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 모두가 생각/감정의 작용에 지나지 않음이니.
설명할 수 없이 미묘한 끌어당김의 법칙이 오늘 문득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