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에 날아갈 뻔 했다. 오르내리는 동안 계속 난간을 잡아가며 걸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휘청대다 못해 강풍에 떠밀려 저만치 냅다 처박힐 지경이었으니까. 모자는 일찌감치 배낭에 접어 넣어야 했다. 수십 차례 일출봉을 드나들었지만 이처럼 기갈 센 바람을 맞긴 처음이라 멈칫해졌다. 그래서인지 관광객 대부분이 등정보다는 우도가 건너다 보이는 우뭇개로 몰렸다.
애국가 한 소절이 떠오르는 청추.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어.... 아니다. 매우 공활하긴 한데 구름장 빠르게 흘러가는 하늘. 하긴 밤새 창가에 짓이겨대는 바람소리 괴이쩍긴 했다. 표선 지날 즈음 차창 너머 바닷가 파도 거칠기도 했고. 그 대신 무진 투명한 대기. 이런 날은 좀이 쑤셔 집에 가만히 있기 어렵다. 막연히 어디든 나서는 게 아니라 이날 행선지는 일출봉이다.
하늘빛 청푸른 날은 당연히 성산 일출봉으로 가야 한다는 고집에 더해, 일출봉 서측 절벽에서 발생한 낙석사고 현장이 어딘지 궁금해서였다. 며칠 전 뉴스를 통해 일제 진지 근처라는 것, 큰 비 내린 뒤라 산사태 주의보가 내렸다는 것까진 파악됐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산이 홀로 속울음 울었을 그 적막감이 가여워서 가서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매달 한두 번씩은 문안인사 차 배알하러 가곤 한 일출봉이다. 그러나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염에 질려 아예 한낮 외출은 포기했던 여름이다. 정수리 머리칼 저절로 꼬불꼬불 파마시킬 듯 불볕 화끈했으므로. 마침 바람도 선선해진 터라 기꺼이 나선 걸음이다.
일출봉 마주했을 때부터 해풍이 심상치 않음을 체감했다. 쾌청한 날씨라 관광버스와 차량이 그득 찬 주차장 주변. 일출봉을 올려다보는데 시야가 맑지 않고 해무 같은 게 낀 듯했다. 부연 기운은 파도의 비말, 대기 중을 떠다니는 미세한 입자의 물보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찹찹했다. 눅눅한 듯 개운치 않은 그 느낌은 서늘하면서도 약간 끈적하달까.
숲으로 들어가면 기분 상쾌해지겠지 싶어 빠르게 계단길 올라갔다. 구월이면 칡꽃 향 음미하며 오르는 산길인데 이미 칡꽃은 져버렸다. 이번에 동행해 주는 벗은 소나무 향기다. 강풍에 부대껴 한층 짙어진 솔 내음과 도반 되어 산을 오른다. 화~하니 풍기는 상큼한 송진 내가 심신 쇄락하게 다스려준다.
첫번째 쉼터 등경돌 바위 곁에서 선채로 텀블러를 연다. 물을 마시고는 가파른 경사로 쉬엄쉬엄 걸어 올라간다.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한 산행이기에 서둘 까닭이 없다. 두 번째 쉼터에서 마주 보이는 하계, 식산봉 외에는 한라산을 비롯 뭇 오름들 자태 희미하다. 곰바위, 장군바위 등 기암괴석을 스쳐 지날수록 점점 더 조망권이 넓어지며 광치기해변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 좋은 날일수록 끝내주는 전망.
좌우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의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난간 부여잡은 채 마지막 디딤돌에서 심호흡을 한다.
산정에 오르자 몸을 가누기조차 버겁다. 최대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이 빠진 오목 접시처럼 아흔아홉 개의 바위들이 성채 둘러싼 굼부리. 올 들어 색깔이 최고로 짙푸르다. 고르게 유약 입힌 청자 접시는 더없이 고급져 진상품 같다. 봄철에는 영역 넓혀가는 시누대 베어내 누렇게 시든 채 깔려있어서 마치 마른버짐 핀 거 같았다.
바람소리 동영상에 담고는 천천히 하산한다. 경사도 심할수록 내려갈 때 더 조심스럽다. 한 층 한 층 가재걸음을 뗀다. 도중에 계단에 걸터앉아 삼양해변 포스팅 한 꼭지 만들어 올리고 우뭇개 바닷가에서 거친 바람과 또 한참을 노닐었다. 문득 몰려오는 시장기에 쫓겨 단골 식당을 찾았다. 주문을 하며 TV를 보니 슈퍼 태풍 라가사가 중국 남부 해상으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한다.
최대 풍속이 시속 230km의 초강력 태풍이라 그 영향권 밖이건만 여파가 그리 어마어마했나. 또 하나, 제19호 태풍 너구리가 일본 도쿄 먼바다에서 발생해 북동진하다 26일경 경로를 우측으로 틀어 도쿄 동쪽 해상방향으로 빠질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한국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전망돼 다행이다만. 일출봉에서 맞닥뜨린 초강력 바람의 파워.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들지 않았아도 광풍이듯 후드껴대는 해풍의 위력은 심히 가공스러웠다.
식사 후 일출봉 서쪽 절벽을 보러 수마포 바닷가로 내려갔다. 여긴 바람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낚시 삼매경에 빠진 강태공도 여럿 있고 보말 채취하는 아낙들도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다. 멀리서 봐도 벼랑 아래에 주의를 요하는 안전띠와 접근금지 팻말이 함께 눈에 띄었다. 예상했던 대로 입구 쪽 일제 진지 인근 산기슭이 무너져 내렸다. 낙석 사고는 생각보다 적은 규모였다. 천만다행이었다.
동시에 등줄기가 후끈 달았다. 동굴 진지를 뚫는데 동원된 조선인들은 완장 찬 일본군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폭약이 터지며 크고 작은 바위 편과 함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때 그들은 모랫벌에 납작 엎드렸겠지. 일본군은 하찮은 미물 다루듯 조센징 잔등을 군홧발로 마구 짓이겼겠지. 다시금 나라꼴이 엉망이 되면 백성꼴은 이리 초라해진다. 비루해진다.
성산일출봉은 1~2월과 11~12월에는 06:00~18:00에 운영하며 매표 마감은 17:00이다.
3~4월과 9~10월에는 05:00~19:00에 운영하며 매표 마감은 18:00이고, 5~8월에는 04:30~20:00에 운영하며 매표 마감은 19:00이다.
휴일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이며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무다. 입장료는 개인 기준 어른 5,000원, 청소년·군인·어린이 2,500원이며 단체 10인 이상은 어른 4,000원, 청소년·군인·어린이 2,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