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풀기

2008

by 무량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뉴저지에서다. 금방 연말이네요, 전과 달리 짧은 인사만 남기고 친구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한 손을 흔들었다. 부자연스럽게 서두르면서 조심하는 눈치였다. 갑장이면서 세례명이 같은 성당 교우다. 그녀가 두고 간 꾸러미는 아주 묵직했다. 야물딱지게 싸맨 보자기 틈새를 들춰보니 꿀이 든 유리병이다. 해마다 산간 오지의 양봉 농가에다 꿀을 주문해 뒀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돌리는 그녀였다.



그간 스스럼없이 편한 친구 사이였던 우리. 근자 들어 관계가 뜨악해졌다. 사사로운 일로 틀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공적인 문제로 우리는 대척점을 이루며 거의 적대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체리힐 성당 분규가 장기화되면서 하나의 관점에 대처하는 시각이 정반대였던 것이다. 서로 상치되는 견해 차이로 인해 은연중 상대를 견제하고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우리는 전처럼 허물없이 터놓고 지낼 수 없게 되었거니와 얼굴 대할 일이 생길 적마다 절로 서먹해졌다.



나이 들수록 너그러워지기는커녕 자꾸 고집만 세어지는가 하면 옳다는 자기주장은 양보가 쉽질 않아 곧잘 독선에 빠지게 된다. 뿐인가. 한번 각인된 고정관념은 편견으로 굳어져 여간해서 수정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알량한 자존심까지 가세가 된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점점 꼬이고 옭말리면서 갈등이 깊어지자 우리 사이의 강폭은 벌어져만 갔다. 한바탕의 폭우로 불어난 물에 징검다리는 떠내려갔으며 강마을 오가던 줄배는 단단히 묶여 버렸다. 마음과 마음을 잇던 이음줄이 툭-하고 끊어지면서 외따로 고립되어 갔다. 관계는 단절되었고 서로는 각자 딴 방향만 바라봤다. 성당 내분은 절친 사이마저 갈라놓았다.



꿀병이 든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옹매듭진 나일론 보자기는 간단하게 풀리지를 않는다. 매듭과 한참을 씨름했다. 급한 성격대로라면 싹둑 가위질을 해버렸겠다. 그리하면 영영 우리 관계도 뎅겅 결딴나 버리지 싶었다. 매듭 상태를 찬찬히 살펴가며 묶인 고를 풀다 보니 대학시절 김희진 선생에게 전통매듭 배울 적이 생각났다. 비단 매듭실로 고를 맵씨 있게 맺어가다 좌우대칭 균형이 비틀리거나 모양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경우 매듭을 되풀어야 했다. 이때 매듭송곳으로 살살 고를 당겨가며 풀어나가자면 요령도 필요하지만 적잖은 인내심이 요구됐다.



한참 만에야 보자기가 풀렸다. 앰버란 보석처럼 투명한 봉밀 특유의 호박빛이 따스하게 다가왔다. 청정한 숲의 정기가 스민 들꽃 내음이 화하게 번지는 것도 같았다.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본 꿀은 그간의 씁쓸한 기분을 단번에 일소시킬만치 달콤하고도 향그러웠다. 그녀는 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와 함께 교리공부를 받으면서 친해진 사이다. 남편이 먼저 이민 와 자리 잡기까지 십 년 세월, 영주권 취득할 욕심에 시민권자와 결혼하겠다며 이혼 요구까지 당하는 등 오만 시련 참고 견디면서 한국에서 치매 시어머니 모시고 남매 키운 그녀. 꿀맛을 음미하다 보니 자신이 겸연쩍어지기도 했지만 느닷없이 오래전 어떤 풍경이 떠오르는 거였다.



지리산 산행을 하다 굿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굿판이 꽤 걸기도 건 데다 곱상한 아가씨가 하도 섧게 울기에 사연을 알고 봤더니 그녀 엄마를 위한 해원굿 자리라는 것. 진주 토박이 재력가의 손녀라는 아가씨, 그녀의 엄마는 청상이 되자 어린 딸을 떼놓고 개가를 했다고 한다. 그다음부터 소녀는 완강히 엄마를 거부해 두 번 다시 상종하지 않음은 물론 징그런 벌레처럼 여기며 척지고 살았다고 한다. 학교 다니는 딸이 보고 싶어도 나타날 수 없어 먼발치에서나 딸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는 그녀 엄마. 딸과 절연한 채 살던 마흔 중반의 그 엄마는 재혼가정도 원만치가 못하면서 우울증이 깊어져 자살을 하고 만 것이었다. 사건 발생 후 심적 고통으로 가위눌리며 여위는 대학생 손녀를 보다 못한 조부모가 주선해 벌어진 오구굿이었다.



진작에 마음을 풀 것을… 진작에 용서하고 화해할 것을…. 그녀는 서럽게 아주 서럽게 통곡했다. 結者解之라 했다. 일은 저지른 사람이 해결해야 하지만 상처 입어 가슴에 한 맺힌 사람이 원망 대신 화해의 손 내밀고 용서하므로 매듭은 한결 더 쉬 풀린다. 아무리 단단히 묶인 매듭일지라도 종내는 풀리고야 마는 법, 그녀처럼 아주 영 때를 놓쳐버리고 가슴을 치기 전에 누구라 할 것 없이 주저하지 말고 얼른 지금 당장 자신이 먼저 매듭을 풀 일이다. 풋내기 氣 싸움도 아니고 이 나이쯤엔 오히려 지는 게 이기는 이치임을 터득할 만도 하건만 앵 돌아선 마음 되돌리기가 왜 그리 어려웠던지. 결국은 내가 먼저 웃으며 마음 풀자고 악수를 청하지 못한 옹졸함이 부끄러워질 밖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