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년 만에 마주한 서울역인가.
강산이 두 번 변한 세월 동안 미국살이를 했고 한국서 살던 전에는 관심 밖이라 주목하지 않았던 서울역이다.
담황빛 벽돌을 쌓아 올린 다음 지붕 중앙에 초록색 돔을 얹은, 비잔틴식의 그럴싸 단아하면서도 단단해 뵈던 서울역.
학창 시절 고향을 찾을 때도 서울역은 거기 항상 서있던, 일제 자취이기 이전 무덤덤한 그냥 건물일 뿐이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상경해도 언제나 총총 역사를 빠져나와 제각기 갈 길 가기 바빠 서울역을 뒤돌아 본 적 없었다.
뭐든 가까이 곁에 있을 땐 진가 몰라보다가 몸도 마음도 멀어져 봐야 그제사 아쉽게 그려지며 심사 애틋해지는가.
앉으나 서나 그대 향한 그리움.... 가요 노랫말처럼 문득문득 생각나던 서울역.
왠지 명절 즈음이면 그 간절함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그립던 서울역에서 새삼 무심함과 유정함에 대한 상념이 교차됐으나 일단 시간 여유가 그리 넉넉지 않았다.
폰으로 주변 풍광 대충 스케치하며 걸음 빠르게 옮겨야 했으니까.
서울에서 볼일을 마친 다음 잠시 부산에 들르는 데는 경부선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기차 출발시간보다 훨씬 일찍 서울역 지하에 도착했다.
한눈에 단박 들어오는 한글 안내판인데도 복잡한 지하역에서 기차 역사로 올라오는 동안 이리저리 길을 찾아 허둥거렸다.
글자 하나 모르는 낯선 유럽 도시에서도 헤매지 않았는데 내 나라에서 길을 잃고 기차 시간 놓쳐 난감해지는 건 아닌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찌어찌 인파에 쓸려서 널따란 대합실을 거쳐 어딘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체 여기가 어디야? 두리번거려 봐도 세브란스병원이 보이던 예전 서울역 광장은 간 곳 없고 죄다 낯선 풍경들.
좌우를 둘러보다가 비로소, 저만치 기억 속의 그 서울 역사 낯익은 지붕이 보였다.
반가움에 쫓아가 보니 지하 차도 그 너머, 가닿을 길 없는 건너편에서 겨우 지붕 꼭대기만 드러내고 있는 서울 역사.
그때부터 뭔가에 홀린 듯 얼이 빠져 어리벙벙해지며 뒤죽박죽 정신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원래 방향치에 길치이긴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동서남북 가늠이 안되고 좌우 분간도 안 섰다.
시선을 둔 정면에 똑바로 나있는 넓고 긴 홀이 보이기에 무조건 직진을 했다.
대리석이 깔린 그 길이 끝나자 자동인형처럼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
남영동 쪽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전혀 알 수 없는 도시 풍경이 기다릴 뿐, 차만 씽씽 내달리고 인적조차 드물었다.
다시 되짚어 처음 자리로 돌아와, 나이 든 행인에게 염천교 근처였던 서울역 광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내가 향했던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상 서울역(地上-驛) 또는 국철 서울역(國鐵-驛)이 있고 지하 서울역(地下-驛)으로 구분돼 있으니,
초행이라면 누구든 헤매고도 남을 법했다.
거기다 지상역은 12개 승강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KTX, ITX-새마을, 무궁화 열차의 출발장이다.
도착장도 KTX, 새마을, 무궁화 열차, 경의선 열차, 천안행 전동 열차의 승강장이라 하니 어찌나 복잡한지 촌사람 충분히 얼떨떨할 만했다.
현재 사용되는 역사는 2003년에 개장한 민자 역사이며, 구 역사는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는데 거기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 쏜살같이 층계를 뛰어내려 갔다.
아, 거기 옛 추억의 장소가 된 서울역사 건물이 오른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LA 유니온 중앙역을 '나의 서울역'이라 이름하며 매번 그리워했던 그 익숙한 모습의 붉은 벽돌에 녹색 돔.
추억 속에 살아있는 예전 역사와 해후하니 반가움 짙어서인가, 왈칵 눈자위가 매워졌다.
왼쪽으로는 유리로 된 세련된 새 역사 건물이 큰 쇼핑몰 거느리고 자태도 날렵하게 서있었다.
옛 역사 주변엔 시위대 천막과 현수막이 어지러웠고, 길가엔 홈리스들이 술판 벌이거나 아무렇게나 누운 채 거리잠에 취해 있었다.
전엔 없었던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너편에서 결기 어린 몸짓으로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앞으로 내닫았다.
"....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란 그분의 유시가 어수선한 시국과 흐린 하늘 분위기와 얼추 맞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시라고 오석에 새겨져 있었다.
서울역은 1900년 7월 8일 경부선의 경성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서울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어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역, 동시대를 산 우리에게는 기쁜 만남과 아쉬운 헤어짐의 장소였던 서울역이라 보는 이마다 느낌이 남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이 말이 서울 토박이에겐 심드렁하게 들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