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 영락재, 정갈스런 운치

한옥스테이

by 무량화


대구시대를 보낸 7~80년대, 우리는 한옥 부연집에서 살았다.

두 아이들 다 동성로 병원에서 태어났으나 아들은 대봉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반면, 터울이 크게 나는 딸은 봉덕동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다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따라서 딸의 유년기 기억은, 라일락나무가 있는 마당과 추녀 높이 추켜올린 부연집에 대한 향수가 있었으리.

청마루 위로 묵직한 대들보가 보이고 한아름이나 되던 나무기둥, 콩땜으로 반들거리는 장판지와 창호지를 바른 격자창, 가운뎃방과 마루방도 아이들 놀이터였으며 널따란 안방 벽장은 숨바꼭질하기에 알맞았다.

봉덕동집에서 살면서 나는 이미 삼십 대 초에 사추기를 겪으며 시난고난하다가 글을 만나 구원받게 되었다.

시가댁 외엔 친구 하나 없는 대구땅, 쓸고 닦고 오밀조밀 꾸미면서 살림 광내는 일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대구매일신문 '주부수상' 란에 생활단상 류의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글꼴이나 제대로 갖췄을까, 그저 가계부 한편에 써둔 메모들을 원고지 일곱 장에 채워서 신문사로 보냈다.

매번 글이 실리면서 차츰 글쓰기에 재미가 붙었다.

말하자면 뭔가를 쓰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되어 준 신문 지면의 주부수상 코너였다.

어느 봄날, 학교 다니는 아들의 담임으로부터 엄마와 함께 하는 백일장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MBC 방송이 주최하는 백일장이었다.

엄마는 고향을 주제로 한 산문을 썼고 아들은 짧은 동시를 써서 둘 다 입선을 했다.

며칠 지나 생면부지의 여성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래전부터 대구 MBC 백일장 출신들이 매달 한 번씩 모여 동인회 활동을 하는데 동참했으면 좋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 후 오월회 동인으로 다달이 한 편씩의 글을 써 모았다가 연말에 동인지를 내곤 했다.

동인 중에는 시로, 소설로, 수필로 등단작가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30대 초를 그렇게 보내다 우리는 84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대구 봉덕동 한옥은 내게 글의 씨앗을 심어준 텃밭이며, 아이들은 자연스레 책과 가까이하는 습관을 들임으로 학업의 길 좀 더 수월하게 걷지 않았나 싶다.



딸내미는 서울에서 하룻밤 머물 곳으로 궁과 가까운 종로통 북촌이나 서촌에서 한옥스테이를 하겠다고 했다.

왜 아니 그러하랴.

한국을 떠난 지 사반세기만의 귀향이니 그동안 얼마나 오래 그리운 것들과 멀어진 채 세월이 흘러갔는가.

유년기를 보낸 한옥집 정취가 문득 아쉬운 것은 김치나 된장찌개 같은 한식이 땡기는 거와 비슷한 이치.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은 많을 테지만 단지 5일간의 한국방문길이다.

하는 일도 일이지만 돌보는 고양이가 여럿이라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어서다.

살구, 박하 등 실내는 물론 길고양이까지 이름 지어주고 거두니, 며칠은 친구가 와서 먹이 챙겨줄 수가 있다.

그러나 길게 할 부탁은 못된다.

딸내미는 멜라토닌과 엔도르핀 팍팍 주는 고양이가 족쇄 되어 자유를 얽어매 버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뭔가를 소유한다는 건 자기도 모르게 거기 묶여 그만 구속되고 마는 것.

소유하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바로 무소유의 역리(逆理)라던 대로다.

단순소박한 공간에서 수행하던 법정스님은 어느 날 출타를 하며 아껴온 난 화분에 얽매인 스스로를 깨닫는다.

애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이 곧 번뇌를 일으키는 인연(원인과 조건)인 것을.

소유에 매이지 않고 탐심을 비워냄으로써 마음의 참평화와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무소유는 설한다.



한옥 스테이도 별빛 야행도 딸이 선택했고 예약했다.

뭐든, 어디든, 내 의견 없이 무조건 딸내미 의사에 따르기로 하였다.

검색 끝에 고르고 고른 곳이 영락재,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담박하고 깔끔한 안내부터 역시 괜찮아 보였다.

대목장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지어진 집이라 했다.

딸내미는 누마루와 전통 창호, 한지 도배에 후한 점수를 주었으며 무엇보다 쥔장의 취향을 맘에 들어했다.

하루에 한 팀만 받는 독채라는 점도 매력 있는 조건이었다.

"서촌영락재는 한국의 전통양식인 한옥에 대한 존중을 담은 1층 한옥 아래에 현대인이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는 비밀의 공간이 숨겨져 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과연 잘한 선택이다 싶었다.

빗질한 자국 선연히 나있는 깨끗하게 쓸어놓은 조붓한 마당.

쪽마루 위로 겹겹이 열리는 입구의 여닫이 창호문은 네 겹이나 됐다.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마루의 고가구와 읽을거리도 완벽, 콩땜 장판지를 깐 아주 간소하고 단아한 침실.

단단한 목재 올린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 새하얀 회벽.

높이 들어올려 지은 누마루에는 삼면에 창호를 달았고 경상, 붓걸이 등 소품 하나하나마다 섬세한 센스 돋보였다.

그러나 정작 전면에 걸린 불한당이라는 당호가 짐짓 웃음 짓게 만든다.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집이라는 집 당(堂) 자가 분명하기 망정이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는 날강도 무리인 불한당과 발음이 같아지니 흐흠! 이 점잖은 분위기에 한번 파안대소하라는 의미.

한옥 1층 곳곳을 섭렵한 다음이니, 반전의 공간이자 비밀의 공간인 지하가 궁금하다.

벽 쪽의 마룻장을 열면 아래로 내려가는 층계 가파르게 나있다.

세상에나~ 한옥 아래 숨겨진 비밀스러운 아지트야말로 완전 반전이다.

계단 아래 공간에다 요모조모 주방을 꾸려놨고 하나뿐인 창 앞에 놓인 화분은 그날 머무는 손님 이름표가 걸렸다.

양식으로 꾸며진 거실과 세면장이 완비돼 있으며 지붕창을 통해서는 채광과 환기구 역할까지 겸비.

쥔장의 고급취미가 읽히는 두 점의 그림과 최신 음향기기를 설치해 놓아 하이엔드 오디오를 즐길 수도.

몽롱한 달항아리 그림과 질감 특이해 설명문을 읽어보니 '철(Iron) 풍경'이란 제하의 그림은 쇳가루와 PV접합제, 아크릴물감으로 리넨에 그렸으며 나무 프레임을 둘렀다고 쓰여있다.

어디에도 작가 이름은 보이지 않아 쥔장 평소 취미가 그림인가 살짝 그런 생각도.

소파에 편안히 묻혀 하룻밤이 아니라 며칠 묵으며 고요히 은거하고 싶게 만드는 아늑한 분위기가 참 좋다.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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