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은 한해걸이로 사람이 바뀌었다. 내용을 알고 보니 독채 렌트를 놓는 집이었다. 그러니 이삿짐이 그리도 자주 드나들었나 보다. 이번엔 세입자가 나가자 곧바로 안팎 수리에 들어갔다. 이탈리안인 집주인이 부산하게 들락거리며 일꾼들을 부렸다. 이 더위에 장미를 심고 페인트칠을 하고 카펫과 전등을 새로 교체했다.
앞뜰 잔디에 물을 주러 나가자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앞으론 자기 아들 내외가 살 거라서 보수공사를 한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몫을 다한 어버이만이 지을 수 있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부모노릇 흡족하게 한 다음에 절로 지어지는 그런 표정을 본 기억이 순간 떠올랐다.
시어른이 차양 공사를 마친 후 찍어둔 사진
74년도 대구 봉덕동 한옥 주택가에 우리 집을 갖게 됐다. 사월 어느 날 처음 그 집을 구경하러 갔다. 그때 라일락이 만개해 있었다. 마당 한켠에 드리운 라일락은 바람이 일 적마다 꽃보라를 일구어댔다. 집 안팎을 두루 돌면서 마음에 드느냐고 시어른이 물으셨을 땐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예상밖의 큰 집을 마련해 주심도 감사했지만 재산 가치에 앞서, 그 집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너무도 좋았던 까닭이다.
너른 대청마루에 상량문 뚜렷한 아름드리 대들보, 부연으로 치켜올린 높직한 기와지붕. 특히 백 년 생은 됨직한 우람한 라일락에 정신없이 매료되었다. 거기서 십 년을 살고 부산으로 옮겨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 집은 팔 수가 없었다. 라일락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나이 들어 다시 그 집에 돌아가 살게 되면 그땐 꼭 추녀 끝에 풍경을 달 생각이다, 란 글도 썼었는데....
시어른이 손수 등기까지 마친 문서를 우리 손에 전해주러 오신 날 비가 내렸다. 깔끔한 타일 토방에 빗방울이 들이치자 추녀를 올려다보시며 차양을 다시 해야겠다고 하셨다. 기존의 함석 차양도 녹슬지 않았는데 무엇을 바꾸시려나? 새파랗게 젊은 우리는 집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며칠 후 대패질된 각목과 슬레이트가 마당에 잔뜩 부려졌다. 쌓인 자재를 보니 간단한 공사가 아니구나 싶었다. 대개 차양막을 한다면 투명 플라스틱 정도를 쓰는데 튼실한 슬레이트로 덮을 계산이라면 대공사일 터다. 목수 페인트공 등 인부 여러 명이 시어른의 감독 아래 일 주간 작업을 했다. 그렇게 견고한 차양막이 완성되자 시어른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바로 옆집 저 아저씨처럼.
한옥은 나무와 흙 같은 자연재료로 만들어진 친환경 건축물이다. 겨울엔 햇살이 방안 깊숙하게 들어오고 여름엔 청마루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올라온다. 물론 외풍이 세고 오르내림이 불편한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한옥은 멋스러움으로 여타 결점을 상쇄시킨다. 암막새 숫막새를 문 잿빛 기왓골도 운치 있고 완자창호와 대청마루는 정갈스럽다. 한옥에서 가장 유려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처마 곡선이다. 일반 한옥은 서까래가 짧아 추녀가 일자 식으로 단출하다. 반면 부연 한옥은 이중으로 겹쳐 댄 서까래가 네 귀를 공중으로 날렵하게 물어 올려 처마선이 맵씨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중후해서 부연집은 멀찍이서 바라보면 의젓한 품위가 느껴진다. 서까래를 덧달아 낸 이중처마 형식으로 처마 곡선이 우아한 이 건축법은 주로 사찰이나 궁중에서 쓰였다. 그러나 점차 여염집으로도 퍼졌는데 봉덕동엔 그런 집이 많았다. 사실 차양을 단 다음 우리집 앞태는 처음만 못해졌지만, 들이치는 비도 막아주고 그늘도 만들어 주는 이중효과는 있었다. 이 집은 훗날 증권바람에 휩쓸린 남편이 날려버렸다. 하지만 첫정이 든 집이라서 그 주소는 내 모든 비밀번호로 남아 지금도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