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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8. 2024

그리던 각시바위에 오르다

마침내 각시바위에 다녀왔다.

현관문만 열면 한라산 자락 흘러내린 왼짬에서 와락 안겨드는, 그래서 처음부터 호기심 일바치던 곳이다.

특히 노을 아름다운 날이면 풋각시 가슴 같은 그 봉우리는 더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매양 은근스러운 눈짓으로 사뭇 유혹하던 각시바위.

선연하게 솟구친 두 개의 암봉 자태도 오연해 언제이고 가보려던 그곳.

 

이태 넘게 거처 창가에서 목 길게 뽑고 바라만 보던 그 오름에 오르는 날.

산 아래 닿자마자 비좁고도 경사 급한 언덕길이 나서는데 학수암이란 안내판 무뚝뚝하게 마주 섰다.

다짜고짜 학수암이라니?

암자를 이르는지 큰 바위 이름인지 초행이라 헷갈린다.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영산사가 앞에 서있고 인근은 죄다 귤농장이다.

비에 젖어 눅진한 대기, 인적은커녕 사방 휘휘하기조차 한 것이 적막강산 그 자체다.

잠깐 서서 각시바위 정보 검색을 다시 해봤다.

이 길이 맞긴 맞았다.

학수암 옆 안내표식 따라 산길로 접어들었다.



처음부터 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큰비 지난 뒤라 미끄럽기까지 했다.

옆집 여선생과 둘이 왔더라면 초반에 아예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그만큼 길은 침침하고 으슥하고 고약했다.

마침 옆집 선생 동료인 체육교사가 동행했기 망정, 두 여자만으론 기가 꺾이기 딱 맞는 분위기였다.

앞장선 분이 나뭇가지에 친 거미줄 걷어가며 길을 터줘 그렇지, 우리끼리였다면 엄두도 못 낼 산행길이었다.

오, 그래서 그랬구나.

각시바위 이름을 알고부터 몇 번, 주변인들에게 가는 방법 물었으나 답변 신통치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여건 때문이었구나.

다행히 길 옆에 보조 로프가 설치돼 있어 줄을 잡고 조심조심 전진하다 보니 급한 오르막길도 끝이 났다.

거기서부터는 숨 가쁠 정도로 숲길 자욱한 안개, 찐한 곰탕국물처럼 안개 입자가 뿌옇게 흘러 다녔다.


유령에 홀린 듯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로 휘적휘적 잡목림 헤쳐나갔다.

완전 전설 따라 삼천리 연출하며 몽달귀신 놀음하듯이.

앞만 보고 걷다 보니 방향 표시고 포제단이고 전혀 눈에 들지도 않았다.

그저 발길 아래 보이는 산길 따라 내처 걸어갈 뿐.

두런거리는 우리들 말소리 외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별일이다.

안개 깊은 날, 먼 숲 뻐꾸기 소리 유독 아련하게 들려오는데 그마저 없었다.

괴괴한 적요.

바로 옆에 보이는 커다란 암벽 아래는 느낌상 신당이 있는 듯했다.

때마침 희뿜하게 드러나는 하늘, 산정에 이른 모양이다.

바위 사이로 난 조붓한 길 휘돌아 오르자 큼직한 암반이 펼쳐져 있었다.


전면 양 가에 삐쭉 치솟은 바위가 멀리서 보면  봉긋한 각시 가슴으로 보였나?

안전한 바위 중심부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전망은 오리무중, 지척 분간 못하게 안개가 밀려다녔다.

빠르게 움직이는 안개 사이로 설핏, 서귀포 앞바다 섶섬이 보이고 제지기오름도 보였다.

그러나 한라산은 아예 감감, 찾아볼 염도 내지 않았다.

기록용 사진 몇 장부터 담아두었다.

재차 각시바위에 대해 꼼꼼스레 검색해 다.

일명 학수바위로도 나온다.

날개 펼친 학 머리 같은 모양새라는 설명이 따른다.

내겐 그보다 스스럼없이 학수고대란 단어부터 다가온다.

학처럼 목 길게 빼고 몹시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인 학수고대 그대로다.

신새벽 정화수 장독대에 올리고 비손 하면 그 정성 하늘에 닿듯, 오래 학수고대한 뜻 오늘  기필코 이루어졌으니.

멀찌감치 서있지만 눈에 뜨일 적마다 꼭 와보고 싶던 산봉우리 이름이야 무언들 어떠랴.

안개 없이 맑은 날이라면 한라산을 비롯 솔오름 칡오름 삼매봉 또렷하련만 대신 울긋불긋 신당 보면 으스스했을 테지.

해서 쾌청한 날보다 안개 낀 날이 외려 더 나을지도...

하긴 아무렴 어떠리.

아삼삼하게 다가서던 각시바위 어렵사리 조우했으니 그만으로 흡족하다.

하산길은 우려했던 것보다 한결 수월했다.

안개 속이라 헷갈려 길머리를 놓치는 바람에 엉뚱한 길로 내려왔는데 그 길은 안전한 데다 짧은 코스였다.

곳곳에 가족묘가 있는지라 거친대로 찻길도 나있었다.

하지만 타고 온 차를 놔둔 곳이 영산사 마당이라 다시 되돌아 처음 온 길로 내려왔다.

역시 로프에 의지하면서.

네비가 인도하는 길이 우린 절 앞이었으나 그보다 묘지 쪽 길이 한층 쉬운 산행길이란 건 헤맨 덕에 알게 된 팁.

다시 간다면 두말없이 그쪽 길을 택하리라.

단순한 원추형 산이 아닌 담에야 기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산세 얼마나 다양하던가.

단적인 예로 산방산의 경우, 동서남북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낯설 정도로 다르기는 백록담 봉우리도 마찬가지, 제주시에서 볼 때와 달리 서귀포에서 보면 영락없이 누워있는 설문대할망 얼굴이다.

각시바위가 학수바위되는 이치도 그와 비슷할 듯.

집에 돌아와 저물녘 어스름에 다시 지켜보아도 이 위치에서는 학수 바위보다는 각시바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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