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나들이

탯자리를 향해

by 무량화


본적지는 충남 당진군 매방리이나, 당진군 대호지 외가에서 태어났다.

난리통의 혼란기라 유년기를 보낸 곳도 순박한 어촌마을 외갓집에서다.

대호지는 대대로 의령남씨 집성촌이었기에 한창 남북 간의 전쟁 치열할지라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전쟁의 포화도 멀찌감치 외곽으로 비껴갔으며 인공치하의 살벌한 사상전도 겪지 않은, 이른바 무풍지대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외삼촌은 일본 유학까지 한 터라 인천에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운영하며 큰 부를 쌓았으나 육이오가 터지자 사업을 정리하고 낙향했다.

똑딱선을 전세 내서 살림살이를 전부 싣고 왔는데 당시 촌에서야 구경도 못해 본 진귀한 물품들이었다.

경성시대 영화에서나 볼듯한 수동식 전화기, 타이프 라이터, 발틀 재봉, 전기다리미, 등나무 흔들의자, 고급 가구며 신식 집기와 기명들, 심지어 찬장에는 은제 신선로도 있었다.

그러나 전기조차 안 들어와 호롱불을 키는 깡촌에서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먹통인지라 그저 내 놀잇감이나 됐으며.


고향에서 정미소를 연 외삼촌은 발동기를 돌려 벼와 보리를 찧고 밀을 가루로 빻아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상처가 나면 아까징끼(머큐로크롬)를 바르러 왔고 배탈이 나면 가루 소화제를 얻으러 오곤 했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우체부가 배달해 주던 신문을 보는 집도 외삼촌네뿐이라 바깥소식이 궁금해도 찾아들 오곤 했다.

그러니 늘 집에는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다만 안타깝게도 외숙모가 배태를 못해 어린 나를 자식 삼고 싶어 했으나 우리 역시 딸 둘 뿐이라 뜻을 접었다.


당시 외조부는 相○(상) 자 항렬이었고 외숙은 ○祐(우) 자 항렬, 그러니 몇 대 더 올라간 할아버지이신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외할아버지는 시제때마다 까만 갓에 흰 두루마기 단정히 차려입고 사당이 있는 도이리로 올라가셨다.

신선처럼 하얀 수염 쓰다듬으며 다섯 아들 거느리고 근엄하게 사당에 가실 적마다 그 '사당' 풍경이 내동 궁금했다.

그 시절엔 당연히 금녀의 공간이었던 사당인지라 따라갈 순 없었지만, 촛불 켜고 향 사룬 다음 절 올릴 적에 피어오르는 향연 신비로운 정경 떠올리면 자못 호기심이 일어날 만도 했다.


외가에서 겨우 오릿길인지라 걸어갈만한 거리이긴 하나 신성한 장소이기에 함부로 가볼 수도 없거니와 시제때와 충장공 제사 때 외에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다는 도이리 사당.

그때까지만 해도 사당은 매우 낡아 금이 간 기왓장에 잡풀이 자라고 여기저기 벽체가 떨어져 나갔다고

들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곳, 좀 더 자라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를 읽은 다음부터 서서히 사당은 내 의식에서 멀어져 갔으며 나이 들어 나는 경상도 아낙이 됐다.


언제부터인지 역사 쪽에 유독 흥미와 관심이 가 닿았고 박물관학회에 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고분, 절터 같은 사적지를 탐방하거나 옛 유물들을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제주에 와서는 울긋불긋 기이한 굿당도 일부러 가보는데 사당이야 그에 비하면 양반 아니랴.

마침 연휴 동안 육지에 나간 김에 고향 나들이를 갔는데 이번엔 꼭 충장사를 들러보기로 했다.

지금은 대호방조제가 들어서며 지도마저 변한 당진, 학생 때인 십 대를 오롯이 산 당진읍내이건만 집터도 찾지 못할 정도로 바뀐 시내.

누렇게 익은 벼 출렁대는 들판이 정겨워 외려 반갑고 충장사 들머리는 늦은 귀향마저도 외갓집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것만도 고맙다는 듯 꽃길을 열어줬다.



사당 뒤편 기슭에 높직이 올라서서 정면을 바라보니 문외한의 안목으로도 동산 너머 앞산 돌올한 기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비구름으로 흐린 하늘 아래, 서너 개의 봉우리가 무척 단단하고도 묵직해 보였으니까..

조선시대 문신에게는 忠莊, 장군에게는 忠壯을 내리는데 충장공 남이흥(忠壯公 南以興)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의령이다.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도병마절도사, 안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이괄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 안주에서 후금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정묘호란의 첫 방어선이던 안주성이 드디어 무너져 내렸고 이때 남이흥의 나이 52세였다.

장군의 장례는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인조는 친히 참석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관을 덮었다.

남이흥에게 내려진 사패지지(賜牌之地·공신에게 내려진 토지)는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가 포함되는 엄청난 면적의 토지였다.

현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부원군에 추봉 되었다.



바로 옆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춘부장 남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忠壯祠)과 정려각, 종가 재실이 나란히 서있다.

충장공 부친인 남유 장군은 나주목사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외적을 물리치다가 47세로 장렬히 순국하여 충신 정려를 받은 분으로 2대에 걸친 충신 가문이다.

조선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예는 매우 드문 경우다.

충장공 불천위 제사는 문중에서 가장 큰 제사이다.

불천위 제사는 4대조까지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나 이 기간이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의미한다.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에 대해 신주를 사당에 영구히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고로 의령남씨가 이어지는 한은 종가에서 계속 이곳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게 된다고.

충장공 제사 음식의 특징은 탕과 식혜를 올리지 않고 대신 칠첩반상을 올린다는 점이라고.



충장사 경내에는 장군의 유물 전시관인 모충관(慕忠館)이 있는데 약 500여 점에 달하는 장군의 유품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하나 오후 늦은 시각이라 안내판 사진으로 눈팅만 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품은 곤룡포를 비롯, 의천부원군(宜春府院君) 남이흥장군 양대(兩代) 충신에게 하사한 사패절목(賜牌節目:당시등기부등본)과 서한(書翰), 고서(古書), 의류(衣類), 영정(影幀), 좌의정교지외 60여 점의 교지, 장군의 관(棺)(내관, 외관)과 청기와 출토품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장군의 호패 1점, 후손의 호패 6점 등이 전시돼 있다.

충장공만이 아니라 남이 장군과 생육신 남효온 그리고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도 의령 남씨들이다.

한결같이 품성 꼿꼿하고 지조 올곧은 분들이다.

의령남씨였던 우리 엄마.

외갓집 식구들을 통해 눈여겨보게 된 남씨 성의 결.

보편적으로 남 씨 남성은 지혜롭고 자상스러운 성품을 지녔으며 여성은 말수 적고 인내심이 강하며 대개 온화한 인성을 지녔다.

외삼촌이나 이모들은 비만체질이기보다 보통체질에 평균치의 키를 유지했으며 건강해서 막내이모는 현재 98세임에도 혼자 생활을 하시다 요즘 병원에 계신다.

엄마는 생전에 잠도 숙면을 취하는 편이었고 뭐든 잘 드셨으며 대사 순조로워 병원에 드나들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부실한 치아 외엔 심신 공히 건강한 편이셨다.

그런 엄마의 체질을 물려받아 우리 자매는 유전질환은 물론 성인병 모르고 산다.

나는 여러모로 모계 성향이 짙은 편이다.

해서 아직껏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이 없다.

잘 먹고 잘 자고 버릴 건 잘 버린다.

매사 이처럼 걸리는 부분 없이 순조로워 심신 건강히 지낸다.

고향 나들이 길에서 자긍심 거듭 확인되며 그 충일감에, 하늘님과 조상님께 대한 고마움 더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