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한양릉은 고고학 박물관

by 무량화
영어 표기를 극구 피하는 중국이나 외국 방문객을 위해 영문판 뮤지엄 안내글 /한무제의 아버지 한경제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대학은 국립대로 진학할 것과 재수 불가를 못 박았다.

90년도에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터울이 많이 차이나는 딸은 96년 대학에 들어갔다.

딸내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엄마 골동취미를 보고 자란 터라 자연스럽게 택한 학과였다.

앞으로의 진로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2학년 학기 초 무렵이다.

과의 성격상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되던지 아니면 큐레이터의 길 외엔 비전이 없었다.

그즈음 마악 중국 유학붐이 일기 시작했다.

딸내미는 중의과로 전과하겠다며 독학으로 중국어 공부를 했다.

중국 북경대와 천진대 중의학과를 겨냥, 세 식구가 현지로 견학을 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연탄가스 자욱한 거리에 자전거가 뒤엉켜 다니고 치안이 형편없었다.

한국의 6~70년대 수준인 곳에 딸을 혼자 보낼 여건은 물론 상황이 도대체 아니었다.

본인도 난생처음 접해본 사회주의 체제에 질리고 고압적인 공안 무서워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98년 IMF 유탄이 우리에게도 날아와 휘청거리게 되자 미국이민을 가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수직상승한 환율, 9천 원대이던 환율이 1만 9천 원까지 올라갔다.

환율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지만 한번 치솟은 환율은 1만 4천 원 선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인턴 하며 결혼한 아들 외의 우리 셋은 새천년 벽두에 기어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 딸내미는 원하던 공부를 하고 한방크리닉을 열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간 몇 차례의 한국방문 중에 2012년도 한국 나왔다가 중국여행을 갔었다.

세 식구가 북경에 갔을 때와는 달리 올림픽을 치른 후라서 인지 면모와 형편이 확 바뀐 중국.

그러다 이번 중국에 가서는 내심 적잖이 놀랬다.

조잡스런 싸구려를 생산해 내는 세계의 공장, 아니면 계란까지 가짜로 만들어내며 함량미달의 불량식품을 마구 수출하는 나라라는 그늘진 중국이 아니었다.

치솟은 고층빌딩, 깨끗해진 거리, 고속철에서 바라본 말끔한 농촌풍경.

국격이 높아지자 자동으로 사람들 표정에선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새 이미지 쇄신을 확실히 하고 당당해진 중국.

거의 충격적이었다.

아마 대한민국도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산업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를 거쳐 놀랍게 변했듯, 중국 역시 등소평의 '백묘흑묘론'에 따른 실용주의적 개혁개방정책으로 발전된 오늘이 열렸으리라.

거기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다시 불붙어 활활 타오르고 그 뒷배가 되는 오천 년 역사가 남긴 무수한 역사유적이며 광활한 땅마다 특색진 절경지 다수를 품은 나라 중국이라 트럼프가 배알 꼴릴 만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 씨, 염려 놓으시라.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저력은 사회주의 국가를 스스로 자체붕괴시키게 만드니까.

지난 세계 역사를 보나따나 제왕적 1인 치하 국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던가.

스탈린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러했으며 고르바초프가 그랬듯이.



관광객이 이처럼 휑하니 빈 유적지는 처음이다.

떼로 몰려다니는, 물결처럼 밀려드는 구경꾼만 보다가 한양릉에서 절로 실소가 터졌다.

비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도 병마용은 우산 쓴 인파 북적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또한 구경거리였는데.

‘중국 최대의 지하 박물관’으로 불린다는데 이름이 무색했다.

비교적 오래지 않은 2천 년대부터 발굴을 진행해 온 데다 박물관을 개관한 지도 그리 연륜이 깊지 않아서일까.

시안 신공항을 건설하면서 도로를 내던 중, 우연히 발견된 양릉(阳陵)이다.

한나라 경제(景帝)와 황후의 무덤이다.

중국 서안의 국가박물관 격인 국가중점유물보호단위(國家重點遺物保護單位)인 한양릉.

한경제(漢景帝)와 왕후의 합장능원(合葬陵園)인 한양릉(漢陽陵)은 西安에서 서북쪽 방향인 건양(乾縣)에 위치했다.

건립 연도는 BC 153년~126년으로 서한(西漢) 네 번째 왕인 한경제(漢景帝)가 만든 王陵이다.

경제는 왕에 오른 4년 차에 자신의 능침을 마련하기 시작했으나 재위 12년 만에 죽자 경제의 아들 유철(劉哲)과 왕후가 축조를 지속, 28년 만에 완공시켰다.

경제는 문제의 아들이며 무제의 아버지이다.

현재의 한양릉은 실제 왕릉이 아닌, 유리벽과 바닥은 강화유리를 설치해 비치된 덧신을 신발 위에 덧신고 돌아가며 부장품을 관람할 수 있게 한 유적박물관 성격이 짙다.

유적지와 같은 깊이의 지하에 박물관과 전시관을 만들었으며 지상의 녹지를 그대로 보존하였다.

관람객들이 가까이에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바로 목전에서 유리 바닥이나 유리벽 통해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놨다.

김해 대성동 고분 발굴현장을 쫓아다니며 토기와 철기 편 몇몇 구경한 안목으로는, 실지 고분 바닥에 널브러진 수천 개 발굴품을 보자 절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온습도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며 유물 보호를 위해 실내조명은 최소화했다는 이 박물관.

동행한 친구는 지하 무덤에 오래 머무니 머리가 아프고 이명이 온다고 했지만 기분학상 그러한 셈.

전 같으면 중국 기술이 별수 있겠어? 얕잡아 보겠지만 이젠 미국과 용호상박, 서로 승패를 겨누는 요즘이다.



양릉에는 총 81개의 부장 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열 개다.

190여 개의 순장터가 발견됐으며 소장유물 중 팔이 없는 남녀 나체 흙인형이 특히 유명하다.

토용 몸통은 테라코타, 거기에 나무로 깎은 팔은 끼워넣었다는데 나무는 긴 세월 견디지 못하고 산화돼 스러져버렸다고.

진시황 병마용은 실물대 크기이나 한양릉 토용(土俑)의 크기는 60cm 정도 되며, 즐거운 표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고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데 대한 불만폭발이다.

그렇게 파악한 한나라 경제는 세금을 과감히 낮추고 불필요한 군비 지출을 줄이면서 민심이 안정된 태평시대를 열었다.

당연히 한나라는 강대국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백성들로부터 환호받으며 집권을 다진 경제도 그러나 사후가 두려웠나 보다.

아니 막강한 권력자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을 거다.

가끔 재벌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 그 많은 재산 다 놔두고 빈손으로 간다는 게 억울하지 않을는지 궁금했다.

보통사람이라면 죽어 아무 집착 없이 영혼 훌훌 가벼이 저 세상으로 날아갈 텐데 어쩌면 부자는 아까운 내 재산, 하면서 구천 헤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물며 황제랴.

생전에 누린 부귀영화 죽어서도 누리리라 다짐 놓으며 생시 똑 그대로 이처럼 재연시켜 놓는지도.

거창한 행차도 해 볼 거라고 마차가 끄는 가마 위엔 화개(華蓋) 씌우고 의구(儀具) 일습 갖춰 위풍도 당당하다.

다행히 언제부터인가 왕이 죽으면 비빈이 함께 묻히던 순장 풍습은 사라졌다.

거기다 전례가 고약했으니 진시황이 하듯 병마용처럼 등신대 토용 대신 작고 귀여운 토용을 부장품 삼았다.

온습도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며 유물 보호를 위해 실내조명은 최소화했다.

아무튼 중국은 뭐든 대륙적, 규모면이나 수치부터 압도해 온다.

중국, 나폴레옹 말대로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잠들게 내버려 두라. 사자가 깨어나면 온 세상이 흔들릴 것이다"라고 한 경고가 새삼 상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