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해운대 바다를 가까이하고 살면서도 또 하나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나. 갯벌이 길게 누운 유순한 바다 서해.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낸 터라 마음의 고향을 그곳에 가꾸고 있다. 그리고 연연해한다. 지금은 ‘대산 임해 공단’이 들어서며 지도가 바뀌었다는 대호지. 앞섶에 넉넉하게 간척지를 품고 긴 제방 너머로 바다가 안겨있던 마을 풍경이 상기도 선연한데 그 바다가 뭍이 되었다 한다. 외숙모 몰래 삽짝을 나서 산 하나 넘어 바지락 캐러 가던 적서리 개펄도 메꾸어졌다고 한다.
충청도의 한 끝에 면한 반 어촌인 대호지에서 대처로 나갈 수 있는 가장 편리한 교통편은 배였다. 인천과 연결된 통통배가 사흘에 한 번씩 환상처럼 아득한 뱃고동을 울리며 하얀 몸체를 하고 앞바다를 질러갔다. 버스를 타려면 시오리 길을 걸어 나가야 되는 벽지였으니 당시 배는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이음줄이었다. 실제 물길로 가는 인천만큼 쉽게 그리고 직접 도시와 연결되는 방법이 달리 없었다.
인천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도시로 당연히 선망도 대단했다. 도청 소재지가 있는 대전보다 상급학교를 진학한다거나 야망을 품고 고향을 뜨는 젊은이들은 주로 인천 가는 배를 탔다. 뿐만 아니라 귀한 물자들은 모두 인천에서 들어왔다. 남포불을 밝혀주는 석유며 원피스를 만드는 예쁜 꽃무늬 포플린 천, 꽃고무신에 비누와 바둑껌까지도. 반면 돈이 될 만한 소출들 역시 배에 실려 인천으로 나갔다. 쌀가마니는 물론 깨, 고추, 계란꾸러미에다 실치포 등속이 공산품과 바뀌어지곤 했다.
그 통통배를 타고 외삼촌은 자주 인천 내왕을 하셨다. 자녀를 두지 못한 외삼촌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그래서 근동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장난감들을 가질 수 있었고 포장이 어여쁜 사탕통을 머리맡에 둘 수 있었다. 일찍이 일본 유학을 마친 외삼촌은 인천에서 사업으로 기반을 닦은 뒤 향리에 돌아와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부속 구입 등의 일로 인천 나들이가 퍽 잦았다. 그때마다 외숙모는 뒷동산 언덕배기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며 망부석 되어 하염없이 배를 기다리곤 했다. 많은 일꾼들 치다꺼리에 물 마를 새가 없던 외숙모의 넓은 앞치마 자락을 감고 돌던 나는 외삼촌께서 언제 오시나 머리 긁어보라는 주문에 고작 정수리께나 긁적거렸다.
추억 속에 남은 외숙모는 늘 삼베 적삼을 입고 있지만 그러나 젊은 시절의 외숙모는 아주 근사한 신여성이었다. 육이오 난리통에 대호지 촌마을에 정착하게 된 외숙모는 동네 사람들이 들고 오는 편지, 주로 군대 간 아들이 보낸 편자를 대독해 주거나 답장글을 달필로 써 내렸다. 한창때 숄을 두르고 까만 구두를 신은 모습의 외숙모 사진과 동그란 안경을 쓴 외삼촌 사진이 든 앨범. 그 사진들은 심심하면 꺼내보는 놀잇감 같은 거였다. 명함판 보다 작은 규격의 누렇게 빛바랜 흑백사진 중에는 내가 최초로 찍은 사진도 들어있었기에 걸핏하면 사진첩을 펼쳤는지도.. 외숙모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은 바닷가에서 찍은 것인데 배경을 이룬 섬이 월미도라고 했다. 갓난아기는 자라 중년에 접어들었고 나를 보듬고 섰던 외숙모는 수 십 년 전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모든 것은 변해갔지만 언제이고 여전한 것은, 인천 하면 월미도부터 떠올려지는 나의 기억회로다.
스무 살 무렵의 어느 날, 강의가 끝난 후에 불현듯 그 섬을 찾아서 인천에 갔다. 내륙 태생인 친구는 바다를 만난다는 설렘에다 같이 떠나는 여행에 꽤 들떠 있었다. 근교 산행은 가끔 가졌지만 짧은 거리나마 함께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달려간 월미도는 이미 옛 명성을 잃은 채 섬 아닌 뭍이 되어 있었다. 배를 타고 월미도에 가는 대신 송도 바닷가 뱃전에 기대앉아 노을 속에 술렁대는 거친 파도만 보고 돌아왔다. 황량한 느낌조차 들게 하던 그 바닷가. 그때 이미 우리의 별리는 예비된 것이었던지 이후 우리는 각자 소실점으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 알 길 없는 옛사람이 되어버렸다.
해마다 겨울바람 몰아치는 연말이면 열병에 휘말리던 그. 연희동 거리에서 플라타너스 너른 잎새 툭툭 발로 차며 "내가 지금 가고자 하는 길이 맞긴 맞나?" 묻던 그. 소공동 대로에 늘어선 신문사에 두툼한 봉투를 밀고 나오며 그는 소년처럼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잘 모르겠어, 걸릴라는지... 신촌문예에 번번이 좌절 겪고는 마침내 글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그는 아예 글을 외면해 버렸던가. 지금까지도 문인 주소록 평론분과를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나 역시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문학전공이던 그는 후진을 가르치고자 대학으로 갔을까?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들이 그때의 내 나이에 이르렀으니까. 더 시간이 지나 이름마저 희미해질 무렵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우린 만나지려나. 행여 그가 나의 잡문이라도 본다면 그리운 바다에 종이배 하나 슬몃 띄워도 좋으련만.
<제물포 문학.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