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 새긴 기도

by 무량화


금정산이 품은 여러 절집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했다는 휴정암.

휴정암 가는 길은 산길치고는 아주 편안했다.

소나무 우거진 언덕배기를 내려서자 널찍한 길이 이어졌다.

낙엽조차 가려 앉는지 방금 빗자루질한 듯 말간 흙길은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길가 바위 곁에 연보라꽃 하얀 꽃 자잘한 들국화 한창 흐드러져 있었다.

독경소리 은은히 들리기 시작했다.

모롱이길 돌자 압도하는 위용으로 병풍처럼 서있는 바위 군(群)이 먼저 눈에 들었다.

기와조차 이지 못한 초라한 암자는 암벽 기세에 눌린 듯 납작했다.

졸졸 약수 흐르는 자그마한 돌잉어가 맞아주었다.

손바닥으로 물 받아 입 헹구고는 세속의 오탁을 목줄기 너머로 흘려보냈다.

고즈넉하고 조촐하니 참말로 때 타지 않은 절이었다.

온데 배어 있는 정갈한 정적 행여 흩트릴라 저절로 발소리 낮춰졌다.

풍경소리만 홀로 뎅뎅거렸다.

생후 얼마 되지 않은 듯 털북숭이 조막만 한 고양이가 모처럼의 인기척이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등산화에 난즉 앉아 끈 가지고 좋아라 장난질 치다가 청바지를 타고 기어오르며 재롱을 부렸다.

하는 양이 하도 귀여워 한참을 놀아줬더니 아예 날 따라나설 태세다.

그래서인지 암자 분위기가 천진스러운 동자승 설화 전해지는 오세암 같기도 했다.

삼국유사 기록에 신라적 두 고승이 서로 내(吾) 고기(魚)라 우긴 데서 이름이 비롯된 오어사도 떠올랐다.



약수터뿐 아니라 여기저기 물고기 모형의 돌조각이 정좌해 있어서였으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암자 뒤편 암벽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락 클라이밍 연습하기 적당할 것 같은 암벽이네, 싶었는데 높다란 바위 꼭대기에는 삼존불이 조각돼 있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오래전 먼 옛적에 바쳐진 기도 원력은 아닌듯했다.

풍우에 마모된 흔적이나 이끼 옅은 걸로 봐서 세월 한참 거슬러 오르진 않았다 한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랴.

금정산 정상 숲 그늘에 깃든 어느 수행승 홀로 끌질 기도 삼아 했음에 자못 숙연해지는 마음.

바위 사이 위태로이 새처럼 앉아 시방세계 밝힐 부처님 모시고자 바위 다듬는 그 자체가 기도수행이었으리.

어떤 시인은 ‘너 어디 있어도 그 곁에 나 있다 하시는 묵언의 말씀 그 위로’라는 시어를 석조 아미타불께 바쳤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이 위 시구와 겹쳐졌다.

신앙의 정상에 다다르면 그 궁극점에서 삼대 종교는 자연히 다 만나게 되는 것을.

'남에게 허물될 일을 하면 뒷날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르리라'는 말씀 나무판에 새겨 있어 심곡에 담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