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마다 붉고 경쾌한 스타카토로

by 무량화


꽃지고 이제는 열매 맺는 계절. 만추와 입동 사이, 산과 들녘에 뭇 열매 익어가는 중이다. 금빛 윤기롭게 농익은 감귤은 서귀포의 상징, 제주의 심장부인 한라산 배경으로 여늬 꽃보다 눈부시다. 먼나무는 먼나무대로, 댕댕이덩굴은 제 덩굴대로, 다정큼나무는 그 나무대로 색색의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유년의 추억이 어린 도토리, 망개열매, 으름, 까치밥, 탱자까지 어찌나 반갑던지. 제주에서 처음 본 멀구슬나무 노란 열매, 요사로이 붉은 천남성 열매, 오미자 열매도 여기 와서 수인사 텄다. 원형 그대로의 자연이 살아있고 원시의 숲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감사히 접할 수 있었던 가을열매들. 그랬다. 이들과의 해후로 스러지는 11월이 삭막하지 않고 나름 찬란할 수 있었다.



제주 어디에나 여름 내내 푸른 그늘 드리워주다가 겨울 들어 고혹적인 빨간색 열매로 눈길 사로잡는 가로수. 그 나무가 먼나무다. 감탕나무과의 상록 활엽교목인 먼나무는 제주도 등 남도의 난대지역에서만 산다. 먹물같이 줄기가 검다 하여 제주 방언 '먹낭'에서 나온 먼나무. 잎새며 열매에다 수형까지 너무 멋스러운 나무라서 먼나무라 하였다고도 한다. 겨우내 진록의 잎 새새로 도드라진 소담스러운 열매는 새들의 귀한 겨울 양식이 되어준다. 공원에 가면 나지막한 키로 단정하게 전지 된 피라칸타를 흔하게 본다. 긴 가시가 있어 울타리 경계로도 심으며 공기 정화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열매는 맛 달콤해서 새들의 간식 같은 먹잇감이기도 하다. 적양자란 생약명을 가진 이 열매는 산후 어혈을 다스리는 등 부인병에 쓰인다.


감나무
오미자
으름
독초 천남성
먼나무
망개
마가목 열매/산수유 열매


남도지방을 여행하던 날이다.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해 주며 뼈와 폐를 튼튼하게 해 준다는 한약재인 마가목 열매를 내장산 정상에서 만났다. 탐스러이 매달린 마가목 열매는 차를 끓여 마시면 좋다지만 그러나 찬 성질이 있어 나와는 맞지 않으니 대충 패스했다. 안개 비 속에서 조우한 산수유 열매는 눈물 같은 물방울이 퍽 아름다웠다. 항균 작용이 탁월해 우리 몸의 유해균 개체 수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산수유 열매. 이에 더해 사포닌까지 함유, 호르몬 대사 기능 저하로 인한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키는 한방 약제다. 간장의 혈과 신장의 정이 새 나가는 것을 막아주며 고혈당 증세를 개선해 주는 귀한 열매다. 백양사 부도탑에서 본 운치 있는 감나무는 한 해 농사가 아주 실했다. 감이 하도 많이 달려 가지가 휘거나 부러질 지경이라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마 이종동생의 젊은 안목으로는 기어이 버려졌을 터이다. 외할머니가 쓰던 시이모 댁 먹감나무 장롱은 고풍스러운 귀물이었다. 옛스런 정취는 네 귀마다 물린 백통 장식이 풍기는 품격에서만이 아니라 냇물처럼 흐르는 목리에 새겨진 품성도 매우 고아했다. 그렇듯 고급가구 만드는데 쓰이는 감나무는 갈옷에 물을 들여주고 감잎 차를 제공하기도 하며 단감 곶감 홍시에 감식초까지 보시해 준다. 한살이를 마무리 짓는 열매이나 저마다 내밀하게 새 생명을 품고 있어 숭고하기까지 한 겨울나무. 볼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만추의 감나무는 불현듯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나무다. 까치밥 몇 개 남긴 겨울 감나무 올려다보노라면 서정시가 쓰고 싶어진다. 나태주 시인처럼 몇 줄의 시어로 그 명징한 고독과 환희심을 오롯이 담아낼 수만 있다면 좀 좋을까.




색깔 중에서 파장이 가장 길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색이 붉은색이다. 열정적이고 강렬한 빨간색은 치명적인 유혹이다. 빨간 입술도 도발적인 유혹이고 빨간 열매도 누군가의 시선을 호리는 유혹이다. 새들에게 먹혀서라도 좀 더 멀리까지 씨앗을 퍼트리려는 종족 번식의 본능. 망개열매, 노박열매, 찔레열매, 괴불나무열매, 사철나무열매, 해당화열매, 남천열매, 고요한 겨울 숲과 황량스런 들판은 보기와는 달리 이렇듯 서로 경쟁 치열하다. 동글동글 반질반질 곱고 곱게 그리고 보석처럼 눈부시게, 열매가 새빨갛게 익는 건 새들을 유혹하기 위한 나름의 수단이다. 상록교목에 파묻히거나 창공에 점점이 떠있는 나목의 빨간 열매는 바람결 없어도 수시로 유쾌 경쾌한 스타카토를 찍어댄다.



붉은색은 인류가 최초로 사용하고 이름을 붙인 색이라 한다. 이는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가 증명해 준다. 사실적인 들소의 격렬한 몸짓을 한층 더 에너지틱하게 만드는 붉고 큰 몸통. 적색은 열정, 역동, 행운, 번영, 승리, 축하, 장수, 사랑을 뜻한다. 반면 경고, 불경, 관능, 퇴폐를 의미하기도 한다. 러시아 볼셰비키나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에 은연중 급진, 저항, 위험, 좌파, 악마, 혁명을 상기시킨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이나 불교 같은 종교 쪽에서는 신성, 경건, 권위, 고귀, 수난의 표징이 된다. 해서 빨강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속내 종잡을 수 없고 쉬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묘한 색. 관능의 탱고 그 감미롭고도 격렬한 선율을 자동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색상도 빨간색이다. 탱고 리베르가 이에 최적격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