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들을 정리한 목록이 버킷 리스트다.
Kick the Bucket, 중세시대 유럽에서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고 발밑에 받쳐둔 양동이를 걷어차면 끝!
여기서 유래한 버킷 리스트라는데 하긴 공통분모가 있긴 하군, 죽어도 해보길 원한다는 점에서.
미루지 말고 죽기 전에 필히 해야 할 일이 그렇다고 반드시 가보고 싶은 장소만 있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꼭 달성하고 싶은 목표, 꼭 해보고 싶은 일,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 꼭 용서받고 싶고 화해하고 싶은 누군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버킷 리스트를 꼽을 때는 자신이 언젠가 한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보길 원하는 곳이다.
나도 내심 그런 곳을 오래 갈무려두고 때가 오기만 기다렸다.
첫 번째는 서안 병마총, 두 번째는 스페인 산티아고였으며 세 번째가 페루 마추픽추였다.
어쩌다 순서가 물구나무를 서, 마추픽추를 가장 먼저 다녀왔고 칠십에 기어코 산티아고길에 나섰었으며 맨 끝으로 비교적 가까운 병마용에 들렀다.
이로써 버킷 리스트를 완결 지었다.
여행 준비를 했다가 팬데믹으로 못 간 서안 병마용을 이번에 다녀옴으로 이제 다 이루었다.
그만큼 벼르고 별러온 서안이다.
마침 중국의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인 장안과 낙양을 묶은 패키지 상품이 있기에 옳다구나 하고 조인을 했다.
대체로 일기 청량한 시월인데 어쩐 일로 거의 매일 비가 왔지만 그나마 고성이나 능은 분위기 상 견딜만 했다.
2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하에 파묻혀 있다가 모습 드러낸 병마용을 찾은 날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병마용은 산시(陕西) 성 시안(西安) 시 린퉁(临潼) 구에 위치했다.
1974년 당시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이를 발견하면서 고고학자들이 대거 몰렸다.
그 후 탐사와 시굴 끝에 첫 번째 병마용갱의 전모가 드러났고 1979년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을 개관했다.
발굴 당시 주은래는 후손들 위해 발굴 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무리하게 능 자체를 발굴하지 않기로 해, 진시황릉 발굴은 중단된 상태였다.
1987년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후 고고학적 작업은 계속 이어져 2 호갱과 3 호갱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발굴은 계속되었다.
2016년에도 진시황릉 주변의 부장갱 400여 곳에서 또 동물의 유골과 도기, 청동기로 제작된 모형 등 유물
수천 점이 수습되었다.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무려 1.5km나 떨어진 병마용갱에 묻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토용들은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등신대 토용 군대다.
등신대라고 했지만 토용의 키는 184cm에서 197cm로 매우 장대한 편으로 나 정도는 단숨에 압도당할 지경.
병마용 즉 병사와 말 모양 부장품 토용을 실물과 흡사하게 만들어 단단히 구운 그 테라코타 모형들을 무수히 세워둔 진시황.
그는 사후에도 현생에서처럼 토용이라도 세워 자신을 호위하도록 한 까닭은?
절대권력자는 많은 적을 만들기 마련이고 주변에 널린 게 모두 다 적뿐이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던 세력들을 생각하면 눈 감은 뒤가 얼마나 불안했으랴.
오죽하면 능침을 만들며 수은을 디립다 들이붓고도 안심 안돼 호위군단 진형(陣形)을 본떠 수없이 세워놨을까,
그도 아니면 평생 누린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에 주지육림의 쾌락을 죽어서도 영영세세 누리고 싶었던 걸까
하긴 위세 부릴 만도 한 것이, 변방의 작은 땅도 아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47년 즉위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 》 [진시황본기] 기록에 의하면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여산(酈山)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세 번 돌 정도로 구덩이(거의 땅굴)를 깊게 파게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중략...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고 불과 4 년 후인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초나라 항우에게 패해 멸망한다.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만 구전으로 오갈 뿐 진시황릉은 그 후 2천 년 가까이 잊혀졌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발견된 토기 조각 같은 유물들로 왕릉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최고, 최대 규모의 고고학적 발견이었다.
세계가 경악할만한 고대 역사의 현장이 그렇게 우리 앞에 펼쳐졌다,
병마용의 역사는 기원전 2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진시황은 즉위 직후부터 시작해 39년간 자신의 능을 어마무지한 규모로 건설해 나갔다.
이 릉은 50㎢의 면적을 차지하며 내외 두 성으로 나뉘어 있다.
내성의 둘레는 2.5km, 외성의 둘레는 6.3km이다.
능묘에는 많은 부장갱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병마용갱이다.
추정컨대 병마용갱은 총 세 개로 토용 7000여 구, 마차 100여 대, 말 1000여 마리가 매장돼 있다고.
병마용들은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기나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연적으로 대부분 퇴색되었다.
정확히는 제작 당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했는데 수천 년 지나 발굴되며 산소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 층이 떨어져 나가며 탈색되었다고 한다.
병마용갱은 황릉 주변에 드넓게 깔려있으며 릉을 호위할 목적을 띤 부장품을 묻은 갱(坑)이다.
결국 이처럼 발굴이 이루어진 곳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규모인 진시황릉의 부속물 일부일 따름이다.
우리가 본 병마용갱은 위 사진처럼 진시황릉의 극히 한 부분, 하여 대륙적 스케일에 숫제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갱도넷을 발견했을 뿐 아직도 나머지를 발굴하려면 백 년 세월로도 모자란다니 입이 딱 벌어진다.
주(周) 왕조 시기까지 존속돼 온 순장 제도는 진나라 시기인 기원전 381년에 이르러 공식 폐지됐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상나라에 이어 중국에 있었던 나라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주나라는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
이때는 왕이 죽으면 비빈과 궁인을 비롯 노예들을 왕릉에 함께 묻는 순장이 성행했었다.
진시황이 토용을 만들어 무덤을 지키게 하면서 순장제는 사라지게 됐다고 했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사기에 쓰여있길 장수, 군사, 관리, 장인, 노예, 죄수, 궁녀와 후궁 등 수많은 사람들이 능에 생매장됐다니.
그뿐만이 아니라 이 많은 등신대의 토용을 만들며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동원됐겠나를 떠올려보면 전횡군주시대에나 가능했던 노역이며 예나 이제나 중국은 사람 수 엄청났구나 싶다.
병마용에서는 병사, 마차, 말, 장군, 곡예사, 악사 등 다양한 모습과 차림을 한 사람들과 말을 흙으로 빚어서 구운 토용이 수없이 발굴됐다.
그러나 대개는 차진 진흙더미 속에서 토용을 발굴하다 보니 부서지고 깨어지기 일쑤.
지금도 한켠에서 조각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현장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작업만도 수십 년이 소요될 듯,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병마용갱이 아직도 많고 많다니.
아마도 더 먼 훗날, 일월이 무수히 흐른 다음에 발견됐다면 토용은 흙으로 온전히 돌아가 있지 않았을까.
세기의 발견이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토용의 꿈을 깨버린 셈일지도.
아무튼 계속 발굴을 추진하지 못하고 주춤대는 이유는 내부에 위험 물질인 수은이 다량 남아있을 가능성도 높은 데다, 이미 발굴된 수많은 유물과 유적 및 유골의 뒤처리와 보존 문제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
갑옷 차림의 여러 병사들 표정은 진중하고 옷깃이며 갑옷에 나있는 돌기마저 일일이 섬세하게 표현된 걸 눈으로 확인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틀림없이 장인의 솜씨인데 어찌 이리도 일사불란하게 작업에 임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른 전제 군주 시황제. 그 아래 힘없는 인민들의 삶은 참담할 수밖에.
누리는 자 발 밑에는 부림을 당하는 약한 자들의 피눈물이 고여있다.
그럼에도 저항도 봉기할 엄두조차 못 낸다면 프랑스 대혁명기 때 울려 퍼진 La Marseillaise는 영영 부르지 못하리.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거늘 아무런 결기도 보이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을(乙)의 신세로 살며, 비굴한 노예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야 하리.
얼토당토않게 여기서 프랑스 국가까지 소환한 건, 한 사람 또는 한 왕실을 위해 너무도 많은 이들이 천부의 인권을 누리지 못하고 인권이 말살된 채 핍박당한 바로 그 현장이라서였으리라.
산티아고를 걷고 난 뒤 수많은 고층의 첨탑 성당들에 질려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정녕 이건 아닌데' 싶어지며 신앙에 회의심이 들기에 이르렀듯.
하기사 우주적 안목으로 보면 천년 역사가 뭐 대수며 도토리 키재기하는 일장춘몽 인간사 우습긴 하다만.
그렇듯 병마용 중에는 화살을 쏘는 자세 취한 궁사도 있지만 검을 든 장수도 보였듯, 원래 모두 실물 크기 청동제 무기로 무장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화살촉이나 검은 부식됐거나 파손됐고.
토용은 마치 살아 숨 쉬듯이 섬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저마다 형태가 달라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단다.
진나라 궁정에서 일하던 사람 수만큼 토용을 넣은 걸로 추정된다니 이 모두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이다.
그러나 이 병마용갱조차 시황릉 언저리 한참 떨어진 주변부 지하 병영에 불과하다.
병마용갱 유물만도 이리 어마어마한데, 그렇다면 릉 내부의 부장품은 또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조차 안 된다.
이리 호사의 극치를 누린 진시황, 죽어 과연 영생에 이르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