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바람으로

by 무량화


11월 창천 눈부시게 푸르른 날, 용눈이오름 바람 앞에 섰다.

왜 바람을 만나려면 굳이 먼 구좌의 용눈이오름일까.

그 오름 이름을 내게 깊이 각인시켜 준 두모악 갤러리에서다.

시시때때로 멀리서 가까이서 용눈이오름 능선 더듬으며 바람을 담은 그.

하많은 오름 중 유독 그 남자가 이 오름에 미치다시피 몰입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오늘 김영갑 작가가 이 오름에 혹한 이유를, 거칠게 갈대 눕히는 바람결에서 비로소 느꼈다.

용눈이오름 주차장에 멈춰 선 차에서 내리려 하자 차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을 정도로 세찬 바람, 그때 알았다.

남자든 여자든 무언가에 마음 사로잡혀 내면 흔들리거나 무너져 내리면 거친 바람 앞에 세워야 한다는 걸.

바람맞으며 잘 벼린 칼끝 같은 결기 다져 한점 빛이 될 스스로의 내공 거듭 쌓고자 와야 할 곳이라는 걸.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던 그는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매료돼 연작 사진들을 찍으며 섬과 짝사랑에 빠졌다.

영혼과 열정을 다 바쳐서.

불가에서는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늘.

생애 대부분의 만남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했지.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다가오는가 싶지만 타생지연(他生之緣)의 끈, 시절인연이 닿아서라지.

그렇게 느닷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가 홀연 스러지는 인연인들 지나고 보면 그 또한 얼마이던가.

제주에 홀린 그 남자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제주바다를 처음 만나곤 열병을 앓았다.

지독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소름 끼치는 그리움 때문에

두 집 살림하듯 오가는 것으론 갈증만 더할 뿐이어서 서울 살림을 접고 아예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신내림 받은 무녀처럼 섬을 헤집고 다니며 제주의 얼과 속살을 카메라로 받아 적었다.

중산간 마을에서는 단편처럼 살다가는 쪽달과 들벌레 야윈 곡소리, 현무암 쪼개는 마른번개를 담았다.

용눈이오름 흐벅진 굼부리에 들어가서는 카메라를 놓고 하루 종일 바람과 살았다."

85년부터 섬에 정착하여 뭇 자연을 피사체 삼아 사진작가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 그.

2001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진전을 통해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이미 그때 그는 루게릭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

투병 중에도 사진에의 애정 뜨거워 서귀포 성산의 폐교된 삼달국민학교를 임대해 두모악 갤러리를 꾸며놨다.



오름 산자락을 오르며 숨이 막힐듯한 절정감에 아! 좋다, 만 연발했다.

극한의 아름다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강렬하게 압도하는 저 부드러운 무리(群落)가 주는 절대미 그 테리빌리타(terribilita)는 차라리 외계 풍정 아닐지.

내 눈에 드는 건 오직 그리고 온통 바람에 맞춰 춰대는 억새의 춤뿐이었다.

나 또한 그냥 들풀 되어 저 산자락 바람에 쓸려가며 미친 듯 춤을 추고 싶었다.

희랍인 조르바처럼 너울너울 그러다가 점점 빠르게 고조되는 춤 시르타키(Sirtaki) 한바탕 추어댈 수 있다면.

점잖은 동행은 아마 타인의 이목 신경 쓰여 짐짓 모른 척 빠르게 걸어갈지도.

자유롭게 훨훨 저 푸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새가 되고도 싶었다.

지상을 떠나 한정 없이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취 사라진 들 어떠랴.

여기서라면 외계 행성에 잡혀간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리.

인체 곡선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유독 아름다워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다는 이곳.

굼부리가 움푹 패어있어 용이 누웠던 자리 같다는 뜻의 용와악(龍臥岳), 용이 놀았던 자리라며 용유악(龍遊岳), 용의 얼굴같이 생겼다 해서 용안악(龍眼岳)으로도 불리는 용눈이오름.

360여 개의 오름들 중 유일하게 용눈이 오름만 분화구가 셋이다.

그중 현재 한 곳만 개방됐다.

용눈이오름 전모를 드론이라도 띄워 관찰하면 화구의 모습이 마치 용의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는데.

낮으막한 오름이라 산책 삼아 걸을 만 하나 그럼에도 정상에 닿으면 성산일출봉과 우도 바다며 지미봉 두산봉 등이 눈 아래 펼쳐진다.

제주의 중심축 한라산이 올연히 솟은 그 아래 오름 울멍줄멍 시립했고 바로 건너편에는 오름의 여왕 다랑쉬 우뚝.

억새나 갈대 사진 찍기 좋은 골든 시간대는 매직 아워(Magic Hour)라 하는 일출 직후나 일몰 직전.

빛이 너무 강한 한낮에는 사진찍기보다 실물을 즐기며 최대한 바람소리 들으면서 억새 춤사위 즐길 것.

여기서 오죽잖은 사진으로 용눈이 억새 훼손시킬라 저어 돼 억새물결 사진은 차마 못 내밀고 주변부 배경과 향기 높던 들꽃만 옮긴다.


맨 위 까만 바탕의 사진: 픽사베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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