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진종일 흩뿌렸는데 어제는 날씨가 청명하게 맑았다.
집을 옮긴 후 아직 인터넷 선이 연결되지 않아 덕택에 읽고 싶던 책도 펼칠 수 있었고 어제는 느긋이 복천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벌써부터 가려던 곳인데 워낙 도시개발이 활발히 진행된 터라 전에 몇 번 가본 곳이건만 길을 쉬이 찾을 수가 없어 미뤄둔 채였다.
폰으로 지도를 확인하고도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길머리를 잡고서 복천 박물관에 이르렀다.
만추의 소슬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건만 예전 삐삐가 가득 자라던 언덕길에 어린 삐삐 새순 발갛게 돋았다.
해바른 양지 녘에 씀바귀꽃 하늘거렸다. 마침 <변한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부산 김해 인근에 근거지를 둔 삼한 중 변한국은 전에 살던 망미동에도 변진 독로국 자취가 토기 조각으로 남아있었기에 연회색 와질토기와 골각기들을 유정스레 둘러보았다.
감회 남다르던 박물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 이사한 집 현관문 안쪽에 복천박물관에서 받아온 포스터를 붙였다.
쇠붙이의 냉랭한 느낌을 덜어줄 요량보다는 아들이 새 거처가 마치 골방같이 어둡다며 못마땅해하는데 자극을 받아서이다.
골방보다는 차라리 금동관이 출토된 가야 시대 고분 즐비한 복천동의 볕 소복한 양지쪽 풍경을 걸어두고 싶어서였다.
맛 좋기로 소문난 옥샘(玉井)이 있던 곳, 복이 넘치는 샘물이 있어서 복천동이라는데 실제 그 동네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부락이다.
임자 없는 산간이나 심지어 산기슭 공동묘지 자리인들 마다할 형편 아니었던 피난민들은 한 칸짜리 하꼬방에서 올망졸망 그렇게 모둠살이를 했다.
여기에 복천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도시팽창으로 1969년 이곳 구릉지대에 새 주택단지를 만들고자 택지 공사를 벌이던 중 우연히 가야 시대 유물이 출토되며 여러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고대사의 공백기로 여겨진 가야사를 규명하는데 주요 실마리를 제공해 준 복천동 고분군의 실체가 우리 앞에 전모를 드러냈던 것.
1981년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복천동 고분군은 사적 제273호로 지정 보존하게 됐는데, 무엇보다 일본 고고학계가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뒤집을 수 있는 다수의 자료가 여기서 확보되었다.
따라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기에 이른 것은 한참 뒤인 2010년의 일.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품을 면밀하게 탄소연대측정법에 의거해 검증한 과학적 결론임에도 앞선 기술을 갖춘 철 교역국으로서의 위상을 내세우며 임나설을 꾸준히 우겨왔던 일본, 여러 정황상 그만큼 임나일본부 이론이 중요한 때문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8세기 때 나온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쪽을 일본부가 실제 통치했다는 일본 측 주장으로 당시까지 반박자료가 없다 보니 거의 고고학계의 주류 학설로 굳어있었다.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국가로 성장한 정치체제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아 일본의 영향 아래 철기를 사용한 후진 지역이라는 결론하에 임나설을 조선 식민지화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던 일제다.
해서 갑옷, 특히 판갑 등 철제품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밖에 없었다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들이밀었는데, 복천동에서 4세기대의 판갑이 나오므로 일본의 억지 주장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전쟁터 병사들의 보호장구인 갑옷은 상반신만 가릴 수 있게 쇠판을 두드려 만든 판갑을 보병들이 착용한데 반해 기마병들은 찰갑(札甲)이라 하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작은 철판을 끈으로 이어 만든 쇠비늘 갑옷을 착용했다.
이 찰갑이 여덟 점, 투구(27점), 목 가리개인 경갑(8점) 등을 합하면 65점이 쏟아져 나오므로 복천박물관은 가히 갑주 박물관이라 일컬어질 만했다.
90년대까지 동아대와 부산대 및 부산박물관 주관하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금동관, 철제 갑옷, 투구류, 화살통, 토기 등을 대량 수습했다.
그때 박물관 회원으로 발굴조사단을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보고 들었던 여러 에피소드들.
고대사 해명에 필요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될 적마다 뛸 듯이 기뻐하던 순수한 열정의 고고학과 학생들의 풋풋한 젊음도 생각이 난다.
철제 갑옷과 철제 마구를 발굴하며 환호하던 연구원의 표정이며 나라가 힘 잃으면 역사마저 빼앗긴다던 학예사의 흥분된 얼굴이 상기도 선연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무려 만 이천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면서 그로써 6백 년을 이어져왔으나 고대 역사에서 홀대받았던 가야의 뛰어난 철기문화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된 점이야말로 복천동 고분군이 남긴 공로다.
그로써 철의 왕국으로 자리매김된 가야, 고대사회에서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제철, 정련 기술을 갖췄음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음을 의미하며 그로써 강력한 왕권을 갖춘 가야국임이 인정되었다.
복천동 고분은 난립해 들앉은 허술한 판잣집 덕에 오히려 훼손이나 도굴을 막을 수 있었으니 세상사는 요지경이요 새옹지마이자 전화위복인 것을.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겨울 볕 다사롭던 어느 오후 끝으로 찾았던 복천동 고분. 다시 와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만큼 변했다.
문득, 격세지감에 만감이 교차되었다.
복천동 22호 분 출토품인 청동제 칠두령, 일곱 개의 방울이 달린 가지 방울. 칠두령(七頭鈴)은 가야의 최고 수장급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바, 이 방울을 손에 들고 흔들면서 의식을 주재했을 터이니 권력 지배자가 종교의식까지 주관했음을 알 수 있다.
복천동 고분에서 발굴된 마두 보호구인 철제 투구와 오리모양 도기로, 부장품에 새 모양 그릇이 많음은 새를 곧 이승과 저승을 잇는 중개역으로 파악한 듯.
역사 산책로에서 / 1998년
봄이 오는 길목, 한유로이 동래행 버스에 올랐다. 오래전부터 마음 끌던 복천동 고분 터를 찾기 위해서였다. 동래 주택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허름한 고샅길이 끝나는 곳. 쥐불을 놓아 까맣게 그을린 둔덕에도 봄소식은 어김없어 쑥이 연한 싹을 내밀고 있었다. 억새 순도 어린 촉은 아주 부드러운 연둣빛이지만 왠지 전체 분위기는 삭막하다. 까치떼의 청량한 지저귐이 주변의 강파름을 다소나마 희석시켜 준다.
외형상 고분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단지 안내판과 빗돌만이 역사적인 터임을 짐작게 할 뿐인 곳. 외국의 경우 묘역이 평지에 이루어지는 것을 흔히 목격하지만 우리네 고정관념상 유택은 산에 있기 마련인데 의외의 장소라 좀 생경스럽다. 큰 산자락이 아닌, 마을 한편에 불현듯 고구마처럼 누운 구릉지가 복천동 사적지라니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하긴 아득한 옛날, 이쯤도 깊은 산골이었을지 모르는 일. 지금은 철망이 둘러쳐져 출입이 통제된 언덕이라 거칠 것 없는 봄기운만 넘나들 따름이었다.
부산에는 역사가 비롯되기 이전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여럿이다.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석기와 골각기 등이 다양하게 출토된 영도 동삼동 패총과 해운대 청사포 일대의 신석기 유적들. 그러나 연면히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줄기가 때론 어둠 저편으로 묻혀버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들 잊혀진 옛사람들의 자취를 되찾게 해주는 것이 유물 발굴 작업이리라.
미래지향적인 과학 분야도 신비롭지만 나는 고고학 방면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흥미도 꽤 느낀다. 규명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수준이 아닌, 그저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재미있고 적성과 기호에 맞아 즐기는 정도다. 아득한 옛적 사람들의 모습과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궁금할뿐더러 현재를 있게 한 과거, 자못 호기심을 자아내지 않는가.
인류가 변화해 온 자취는 기록을 통해 읽게 되지만 그 이전의 시대는 유물과 유적에 의존하는 도리밖에 없다. 피라미드를 열어 이집트의 비밀이 풀렸는가 하면 폼페이가 되살아나며 로마시대로 여행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하라 사막이 숲 우거져 뭇 동물이 살았고 반구대 그 아래까지 바닷물 찰랑대 고래잡이했더라는 옛날이 상상이나 되랴. 선대들이 남겨놓은 바위그림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마을 뒤 낮은 능선에 분포된 복천동 고분군은 선사시대 부산의 내력을 규명해 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주택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모두 78기의 고분이 확인됐으며 3천여 점의 다양한 유물을 수습한 바 있는 부산의 대표적 고분인 복천동 고분군. 다수의 토기류와 철제 투구 및 갑옷을 비롯한 철기류, 금동관이며 금제 귀걸이 등 장신구가 쏟아져 나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한다. 특히 철기에 있어 다른 어느 저역 고분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았고 종류 또한 다채롭다는 것.
4-5세기 무렵. 동래 땅에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후대를 위한 친절한 기록이 없으니 다만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헤아려 볼밖에. 잠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라는 중국 역사서를 참고 삼아 펼쳐본다. 거기에는 '변진 독로국이 철을 생산하여 한인 왜인이 모두 이것을 가져가며 모든 매매체에 철을 사용함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함과 같았다'라고 쓰여있다. 지금의 동래지역에 자리 잡았던 나라가 변진 독로국으로 그 뒤를 이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야 문화권에 속해있던 동래다. 실제 복천동과 지척거리인 낙민동 패총에서는 철을 제련하였던 용광로 터가 발견된 바 있으며 복천동 고분에서는 덩어리 철이 다량 출토되었다. 예전부터 부산 인근 지역인 물금과 녹산 등지에서는 철이 생산됐다 했으니 이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동래 복천동은 육이오 전까지만 해도 수목 우거진 야산지대였다고 한다. 전쟁통에 산자락마다 판잣집이 들어섰다가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 중 고향 잃은 이들이 그냥 눌러앉아 살면서 주변이 무차별 훼손되기도 한 이곳. 반면 어수선한 세월이라 암암리에 상당수 분묘들이 도굴당했으나 집이 들어선 곳이나 주요 분묘인 대형 고분들은 거의 지하 깊숙이 축조돼 있어 그나마 원형보존이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복천동 고분군 발굴 성과 중 최대의 수확이라면 4세기 때의 갑주(갑옷과 투구) 발굴이다. 최근까지 일부 일본 학계는 자국 고분에서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의 갑주가 다량 출토된 반면 한국에서는 5세 이후로 집중돼 있는 점을 들어 일본 갑주의 한반도 전파를 주장하며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존재 근거라고 끈덕지게 강변해 왔다. 그러다 복천동에서 4세기 갑주가 다수 발견됨에 따라 우리가 도리어 이에 대항하는 확실한 규명 자료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고대문화의 원류, 특히 역동적인 국제관계를 밝히는데 주요 지표가 된 복천동 고분군이니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질 만도 하다.
복천동 고분군 일대를 역사 산책로로 지정, 현재 주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아울러 유물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 투시도가 선보이며 당당히 서있다. 명실공히 동래지역의 역사교육장 역할을 할 전시관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언덕에서 아까부터 연을 날리고 있는 조손 모습이 한 장의 명화로 새겨지는 고즈넉한 오후. 고분 터를 뒤로하고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미루나무에 둥지 튼 까치소리, 포근한 저녁 햇살과 함께 나를 전송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