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부산시 지방 무형문화재 8호인 그녀는 강태홍류(流) 가야금산조의 기능 보유자다. 그녀를 먼발치에서 만나 본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목소리가 아주 나지막한 중년이었다. 버선발로 조용조용 화문석 위에 정좌한 그녀. 앉음새가 단아했다. 치자 빛 물 고운 깨끼 한복이 서늘했다.
둥기둥 동동…, 섬세하고 청아하면서도 가락은 기운찼다. 그럼에도 세속의 오탁을 초월한 해맑은 소리였다. 마음이 고요해졌다. 정결하고 아늑해졌다. 결기 센 감정은 녹녹히 다스리고 거친 기운은 발 고운 체로 걸러 낸 뒤 가장 보드랍고 여린 그 나머지마저 서두름 없이 정화시킨 상태. 해인(海印)의 경계를 언뜻 넘겨다본 것 같았다.
왜일까, 명치끝으로 쩌르르 전류가 흘렀다. 새벽 창에 스며드는 가녀린 여명, 혹은 저물녘 푸르스름한 이내빛에 잠길 때의 우수가 서려 있어서였다. 장구 소리는 어깨 들썩이게 하는 신명을 일바치지만, 가야금 소리는 소슬한 감상에 취해 심연 깊숙이로 가라앉게 만든다. 끝 모르는 침잠. 그와 동시에 서서히 손끝 힘이 빠져나갔다. 잡다한 세사로부터 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순간일지언정 거의 탈속의 경지에 가닿지 않았던가 싶다.
생음악으로 접한 가야금 소리에 잠시 비몽사몽 간의 선계에 들었던가.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른거리던 영상이 차츰 가까이 다가섰다. 화문석 위에서 가야금을 타는 여인의 모습 위에 겹쳐지는 또 한 여인. 그녀는 뜻밖에도 배산 정상에서 만난 가야 시대 옥녀였다. 옥녀는 아득히 먼 시절에 살다 간 오래 전의 옛 여인이다. 선녀 같은 머리 매무새를 하고 푸른 옷자락 길게 늘어뜨린 옥녀.
가야금을 만든 우륵이 대가야 사람이니 그녀가 가야 이전 여인일 리는 만무다. 배산에 올라 저 아래 창창한 남해바다 굽어보며 가얏고를 타던 그녀. 단지 외로운 예인의 길을 닦기 위해 아무도 없는 산정을 택했던가.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가얏고를 울렸던가. 혹여 신벌이라도 받았음인가. 손끝에 피맺히도록, 종내는 바위가 되도록 가얏고를 타야 했던 그녀는.
부산에 자리 잡고 살면서 아침 등산지로 집 뒤에 있는 배산을 자주 올랐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였다. 어느 날 산기슭 북쪽 후미진 골짝에서 녹슨 채 쓰러진 안내 표지판을 일으켜 세웠다. <盃山城址와 蓮池>란 제하의 안내문을 읽어 나가다 옥녀를 알게 됐다. 정상 바위 중 하나의 이름이 옥녀탄금대, 따라서 바위로 화한 채 가얏고를 타는 여인은 옥녀인 것이다. 그즈음의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내심 단편소설 한 편을 공그르기 시작했다.
배산은 수영구 망미동에 위치해 있다. 까마득한 일월 거슬러 오르면 이 터는 삼한시대 변한에 속한 곳이다. 변한의 열두 개 부속국가 가운데 변진독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전한다. 독로국은 낙동강 동쪽 부산권의 유일한 부족국가로 철을 생산하는 힘 있는 나라였다. 철을 다루는 수공업이 발달한 데다 철을 매개로 왜 와도 교역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니 당시로는 만만찮은 나라였으리라.
뿐만 아니라 배산 북서쪽 정상부 능선에 자리한 연산동 고분군도 그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지배층 분묘로 여겨지는 거대한 고분에서는 철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이미 일제 때 도굴 당해 남은 것은 자료뿐이지만― 시대 분류상 삼한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또 한 곳 배산 성지가 있는데 쌍가락지 모양의 이중 토성 역시 삼한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삼한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해 삼국시대를 이뤘다. 통상 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칭하는 말이나 그 당시 엄연히 가야라는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그래서 가야인의 후손들에게 내내 지탄받는 처지일 밖에 없다. 삼국사기가 홀대한 그 가야를 살펴보자. 진한의 사로국에서 신라가 출발한 반면, 변한 사회에서 성립돼 발전한 가야. 그중 금관가야에 속한 거칠산국이 지금의 배산 일대를 근거로 융성했다. 그 땅에서 번영 누린 옛사람들의 흔적인 양 산록 여기저기서 지금도 예사로이 눈에 띄는 토기 편이며 기와 조각들.
거칠산국은 소집단의 부족국가였지만 이름 그대로 기질과 기상이 용맹스러웠다. 거칠다는 것은 한편 용감함을 뜻하기도 하니까. 어쨌든 바로 이웃한 신라에게 있어 거칠산국은 나라의 근심거리로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나라를 세운 지 백 년 남짓한 신라로서는 영토 확장을 위한 세(勢)를 키워 나가는 입장에서 거칠산국이 자연 제거 대상 첫 번째로 지목될밖에. 하지만 거칠산국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무렵 거도가 등장한다. 삼국사기의 ‘居道列傳’에 따르면 신라의 지방관으로 임명된 거도는 한 가지 계책을 꾸미기에 이른다. 계략인즉, 해마다 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마숙(馬淑) 놀이를 하게 한다. 이를 자주 본 거칠산국에서는 어떤 군사행동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경계치 않음을 틈타 불시에 거칠산국을 쳐서 신라에 복속시켜 버린다. 신라 탈해왕 때의 일이다.
한 가지 의문이 없는 바는 아니다. 거친 뫼 즉 황령산이 높다라니 바로 앞에 섰는데 산세 규모로 보나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배산이 어떻게 거칠산국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 시절 기준으로야 황령산은 험준한 산맥 같았을 테고, 그에 비해 적당한 높이의 안온한 배산이 사람 살만한 입지조건이라 여겼을 법도 하다. 배산임해의 지형에다 완만한 경사로 펼쳐진 들판, 가까이에 수영강 맑은 물이 넘쳐흐르며 주변을 비옥하게 가꾸어 주었으리라. 앞바다에 나가면 고기와 조개는 얼마든지 있고 사철 기후는 온후하였다. 더욱이 온종일 해바른 배산은 그 옛날, 다디단 물이 한량없이 솟는 축복의 땅이자 은혜의 땅이었다.
배산에 근거한 거칠산국 백성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적어도 신라의 팽창 야욕이 불붙기 전까지는. 그곳의 옥녀, 그녀는 거칠산국의 어떤 존재였을까. 그녀가 바위로 굳은 연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치술령 망부석이 그러하듯 누구를 그리도 간절히 기다렸던가. 기다림의 끝, 더 이상 기다릴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명은 무로 잦아드는 것. 옥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혼자 남아 누리는 영화의 부질없음을 안 그녀.
아무래도 옥녀는 일반 평민은 아닐 성싶다. 당시 가야금이 어느 계층까지 보편화됐는지 몰라도 예나 이제나 특수 악기를 다룰 만한 형편이라면 예사 위치는 아닐 터. 사실 길쌈하고 방아 찧으며 일에 파묻혀 사는 신분이라면 가야금을 즐길 여가인들 있을 리 없다. 그녀는 거칠산국의 왕족이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님은 패기 넘치는 젊은 장수로 그들은 결혼을 약조한 사이다. 두 사람은 연꽃 만발한 연지에서 가야금 가락에 그윽이 취하기도 하였을 테고, 함께 남해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앞날을 꿈꾸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거도는 파죽지세로 성을 치고 들어온다. 이미 풍전등화가 된 국운. 거친 말발굽 아래 님은 스러지고 그녀는 비탄에 빠진다. 마침내 신라에 치욕적인 투항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자 그만 한 덩이 바위가 되고 마는 그녀. 사랑하는 임 대신 아끼던 가얏고를 품에 안은 채.
이제는 배산의 안내 팻말도 바뀌어 옥녀탄금대란 이름조차 보이지 않는다. 옥녀여, 그대는 한 서린 넋 거두어 어디로 영영 떠나 버렸나. 아직도 배산엔 그대의 가야금 소리가 남아있음을 잊지 마소서. 나목 사이로 달음질치는 눈바람 소리로, 산죽 흔들며 지나는 바람 소리로, 혹은 달빛 푸르른 밤 교교한 밤새 소리로 남겨진 그대 가야금 소리. -수필과 비평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