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산방산 스치고 송악산 노을

by 무량화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마라도행 여객선을 타려면 모슬포 운진항에 가야 한다.

블루 레이호를 타면 마라도까지 30분 걸리고 가파도는 약 10분 정도 소요될 정도로 모슬포와 거리가 가깝다.

모슬포의 겨울철은 뭐니뭐니해도 방어가 제철을 맞는 계절이다.

방어는 11월부터 2월까지가 가장 살이 단단하고 지방이 많아 쫄깃하고 고소하니 맛있는 시기.

크기가 크면 클수록 방어 맛이 뛰어나 모슬포 횟집에 가면 거의가 대방어를 찾는다.

모슬포항 일대에서 지난 11월 20일부터 4일간 '2025 최남단 방어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물결처럼 밀려다니는 숱한 인파에 치여 저지난해 한번 가보고 더는 안 갔는데, 오늘은 주말이라 친구와 모슬포에서 만나 방어를 맛보고 송악산을 걷기로 약속을 했던 터.

점심 식사 후 대평원에 펼쳐진 양배추밭 무밭 콜라비밭 브로콜리밭 사잇길 따라 송악산으로 걸어갔다.



토요일인 오늘은 특별히 운(雲) 좋은 날.

새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이 하도 멋있어 시선을 위로 보냈다가, 어느새 봄의 전령 유채꽃 핀 밭자락에 눈길 바삐 옮기며 걷는 길이 너무너무 행복하기만.

신이 난 간세처럼 겅중거리며 조붓한 흙길로 이어진 올레길 10코스 일부를 걸어갔다.

들녘은 초록 일색이고 춥도 덥도 않은 날씨라 걸으면서 소확행이란 바로 이런 순간 아니랴, 제 흥에 겨워 콧노래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다 올레객이 지날 뿐 더없이 평화롭고 고즈넉한 공간, 푸른 밭길 지나자 이번엔 묵은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진 채 기다렸다.

제주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평원의 야생성,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로 찍을 만큼 근사한 원시의 땅이었다.

그렇다고 말을 기르는 곳도 아니고 아무튼 황량하도록 드넓은 벌판에서 자유라면 몰라도 아늑함마저 느껴지다니, 나이 든 우린 나이를 잊고 야생마처럼 달리기도 하고 좋아! 좋아! 마구 외치기도 하였다.

희랍인 조르바처럼 한바탕 너울너울 춤이라도 춰볼 것을, 어설프더라도 그리 해 볼 것을.

그러나 우린 그만큼 거침없는 자유인은 아니었던 듯.

아니, 조르바처럼 삶 앞에 솔직해질 수 있으며 진실로 진실로 뜨겁게 살아본 자만이 그리 춤출 수 있음이니.

등판에 땀이 나고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열기에 들떴던 우린 알뜨르 비행장 안내판에 이르자 조용해졌다.


아래쪽 뜰이라는 제주어인 알뜨르.

알뜨르 비행장은 뼈아픈 역사가 잠들어 있는 서글픈 유적지로 비극적인 현대사가 골골에 새겨진 곳이다.

중일전쟁 발판을 닦기 위해 전초기지로 만든 비행장인 이곳에서 공군은 남경 폭격을 준비했던 대로 난징대학살극을 벌여 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뒷날에는 가미카제를 위한 조종 훈련을 시키면서 송악산 해변에 굴을 뚫고 숨어 미국 전함이 오면 몸 던져 공격하려 했다.

넓은 들판 곳곳에 여러 개의 격납고가 엎드려 있으며 인근에 지하 벙커도 여러 개 설치돼 있다.

지하 벙커와 격납고 등의 시설물은 당시 일제가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약 십 년에 걸쳐 만들었다.

결국 나라를 잃으면 백성들만 고스란히 고통을 당한다.

조선왕조가 무너지며 왕족이나 고위직에 있던 고관들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평생 호의호식을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막상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정부 고위 관리와 부유층은 어떤 루트로든 도피해 앞날을 도모한다.

그저 고스란히 앉아서 죽어나가는 건 민초들 뿐이다.

이쯤에서 불행한 역사가 끝난 게 아니라 격납고 주변 섯알오름은 훗날 학살터로 변해 가슴 아픈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일제가 만든 폭탄 창고에서 폭발사고가 나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는데 육이오전쟁 당시 여기서 예비 검속으로 수감됐던 일반인들을 처단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제주도경찰국이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울을 빼앗기고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아 내려온 정부, 그러나 낙동강 저지선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정부가 제주로 내려올 계획을 세웠으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로 수복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제주로 정부가 옮겨질 경우를 대비해 제주 내의 치안을 공고히 다져놓고자 검속자들을 미리 없애버린 것.

아직도 섯알오름 학살사건을 4.3과 연관 짓는 데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나는 별도의 사안임을, 아흔 가까운 해설사를 통해 이참에 새롭게 알았다.

알뜨르는 다크 투어 코스로 비행장, 관제탑, 대공포진지, 격납고 등이 학생들과 일반인 견학장소로 개방됐다.

현재 인근 땅은 국방부 소유 군용지로, 농사짓는 주민들에게 농지로 임차되어 농작물을 가꾸고 있다 한다.(아하, 그래서 대정뜰에 광활한 야생의 평원이..)



섯알오름 불행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 시대를 산 해설사의 생생한 증언을 듣느라 많이 지체된 시간.

송악산에 이르렀을 때는 금빛 석양이 내릴 즈음이었다.

우리 발길은 거의 경보를 넘어 요즘 대세인 러너로 변해 송악산 초입 언덕길을 바삐 내달렸다.

솔숲에 이미 노을빛이 번져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진지동굴이 언덕길 위아래로 보였으나 바짝 다가가진 않고 대충 언저리 목책만 사진에 담았다.

일몰 명소로 잘 알려진 송악산인만치 마음이 먼저 내달아 전망대로 가 있었다.

숨차게 전망대에 이르자 앞바다는 온통 금칠을 한 듯 눈이 부셨다.

파도 잔잔해 바다는 금가루 고르게 뿌린 양 윤슬 부드럽고도 길게 반짝댔다.

다만 태양을 숨긴 채 두꺼운 구름층이 낮게 가라앉아 있어 윤슬은 사라졌다가 되살아나곤 했다.

그런만치 구름장 틈새를 비집고 내쏘는 강한 빛줄기, 빛내림 현상(Tyndall phenomenon)이 전개됐다.

오늘은 운 좋게도 푸른 하늘에 두리둥실 뜬 구름만 멋진 게 아니라 대기와 빛이 만들어내는 자연 예술 또한 진귀한 선물로 안겨졌다.

바다는 유전지대에 번지는 불길처럼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온통 화염에 휩싸인 하늘을 받들고 있는 무섭도록 검푸른 바다.

마주 보는 두 마리 용이 격렬스레 애무에 빠진 기묘한 구름층의 반란에 속수무책 넋 잃은 하늘.

마악 장엄 낙조가 내리기 직전 태양의 다비식, 몰아의 한순간 전신만신 속속들이 불태우고 혼절해 버리는 격정이 듯 미친 척 화려 찬란했다.

시시각각 괄게 타오르는 장작불이다가, 마그마 폭포처럼 흘러내리다가, 거칠게 쏘아대는 화염방사기이다가, 한 깊은 여인이 울컥 토해내는 절규이다가....

영광의 순간이듯 찬연하다가, 분노의 눈빛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황족의 드레스인 양 호화롭다가, 마지막 몰아쉬는 숨처럼 처연스럽기 그지없는 낙조.

아니다, 본능적 삶의 열정에 자신을 불사르는 안나 카레니나 혹은 욕망을 소비하는 보봐리 부인과도 닮았다.

아니 아니 그보다는 "폭풍은 외부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분다"라 했던 폭풍의 언덕 속 히스클립처럼 종당엔 모든 걸 파멸로 몰아가는 극단의 사랑 같은 게 아닐까.

분다운 사념이 교차되는 찰나.

이윽고 까무룩 침몰해 사라지고 마는 해.

서서히 쇠잔해 가는 빛의 자취, 금세 바다는 푸르스름한 빛에 포위된 채 갈대바람 어수선해졌다.

저만치 물러나 앉은 가파도와 마라도 등대불빛이며 가겟집 전등불 점점이 되살아나리라.

그쯤에서 우리는 어둠살에 싸인 송악산을 뒤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