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반전, 아부오름

by 무량화
구글에서 옮긴 항공사진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데도 자리에서 쉬 일어나지 못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진한 여운에 잠겨 영상에 몰입했던 감정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추스를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듯이.

그때 미리 영화 리뷰를 살펴보고 오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아무 선입견 없이 그처럼 백지상태에서 마주한 자연이야말로 온전히 가슴으로 충실하게 스며드는 법.

아부오름은 그렇게 내 마음에 스며들어 깊은 감동으로 아로새겨졌다.

얼핏 보기엔 만만할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봉긋한 오름.

작고 아담한 아부오름이다.

기대하는 바 적었던 만치 그에 비례해 비밀의 굼부리 숲은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었다.

인근 구좌에 다수 분포된 용암동굴 비밀스런 지하세계와 달리 하늘 향해 넉넉히 둥근 품 열어젖힌 굼부리.

전망대에 올라서서는 웃자란 소나무 큰 키에 가려 굼부리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안내판에 게재된 대로 항공촬영이나 드론사진으로 찍으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굼부리 둘레에 소나무숲 울창했다.

그 아래 드넓은 분화구 안에 둥글게 식재된 삼나무는 외계인 눈처럼도 보였는데.



나에게 동부의 뭇 오름은 '먼 그대'였다.

비교적 거리도 먼 데다 교통편이 불편해 큰 맘먹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알만한 이는 잘 알다시피 제주섬은 생각보다 매우 넓어 서울시의 세 배 크기, 동서 길이 약 73km인 면적이다.

서귀포 구도심에서 구좌 비자림에 가자면 대중교통으로는 좋이 두 시간 여 걸린다.

자차 이동이 아니라면 동부 오름들은 대체로 가기가 퍽 상그럽다.

도로망은 잘 뚫려있으나 일반 교통편과 연결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일단 인구분포도가 낮은 지역, 곧 마을이 없는 오지라서다.

그러하듯 오름이나 곶자왈은 동쪽과 서쪽에 집중 분포돼 있는 데다 거개가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

어쩌다 관광지 순환버스가 다니기도 하나 배차시간이 길어 그도 마땅치가 않아 특별히 이용해 본 적은 없다.

굳이 작정하고 마음을 내면 못 갈 바는 아니나 오름이 아니라도 갈곳 천지인 제주라 그간 소홀히 한 오름이다.

하여 360개나 된다는 오름 중 가본 곳은 서른 곳이나 될까말까다.

근자 귀인을 만나게 돼 무엇보다 여러모로 신뢰할만한 터라 몇 차례 오름길에 동행했다.

높다란 다랑쉬오름도 인상적이었지만 어제 방문한 아부오름이야말로 매우 각별한 지형 신비로웠다.

아부오름의 화룡정점은 굼부리, 사전검색 없이 무턱대고 간 곳인데 경탄할 만큼의 놀라운 비경을 선물해 줬다.

아부오름 정상 전망대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못한, 전혀 예상밖 반전의 묘라는 비장의 카드패를 내밀었으니까.

전망대는 단지 주변 뭇 오름 감상용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눈 맛 시원한 감은 들지 않았다.

기상상태 별로라 시야가 트이지 않아서 한라산은 자취 감췄고 가까운 오름들 울멍줄멍 시립해 있을 따름.

오름 산정 분화구를 따라 나있는 둘레길을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정성스레 다듬어 놓은 둘레길이지만 섣달인 지금은 마른 풀섶에 시든 수국 무더기만 줄지어 서있었다.

다만 걷는 내내 솔바람 소리 쏴아 쏴아 들려 피톤치드와 더불어 평화로운 힐링타임 돼주었다.



반 바퀴쯤 돌았을까, 아부오름 둘레길과 아부오름 분화구 입구를 알리는 안내표지목이 기다렸다.

그 아래로 조붓하게 나있는 길이 보였다.

주춤대다가 그 길로 들어섰다.

좁은 길은 얼핏 어려운 길, 위험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가볼 만한 길이었으니.

모험 같았으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레전드 액션 어드벤처 '인디아나 존스'나 '쥐라기공원'같은 분위기는 아니라도 그 비슷한 흥분과 두려움이 인 까닭은 음산한 날씨 탓이었으리라.

마른 낙엽 되쌓인 길을 제법 한참 걸어내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부오름 높이보다 더 깊게 파인, 제주 분화구 중에서도 특히 깊은 굼부리다웠다.

분화구 안이라는 안온한 환경은 겨울임에도 이끼며 양치류 식물 푸르게 자라도록 도와줄 만도 했다.

화산 분화로 튀어나온 화산쇄설물(scoria)이 분화구 주변에 쌓여 만들어진 터라, 끈끈한 흑갈색 화산회토 토질은 매우 기름져 다양한 식물의 보금자리가 돼주었다.

얽히고설킨 덩굴식물 무성히 서로 뒤엉킨 길이 끝나자 무뜩 울울한 삼나무 숲 검푸르게 눈앞 가득 전개됐다.

아,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여기가 바로 그곳!

분화구 밑바닥에서 울울창창 자라난 삼나무들은 분명 누군가의 발상에 의해 둥글게 식재된 그 나무들이렷다.

누구였을까? 탄성 발하게 하는 이리도 기발하고 신선한 기획을 창의적으로 시도했던 그는?

구좌에 살며 진심 자연을 사랑한 민간인이었거나 산지 및 관광지 개발 책임자였을지, 첫 발상처가 궁금했다.

진작에, 이중섭 거리를 브랜드화할 생각으로 이를 직접 기획 설계한 서귀포 초대 민선시장님도 겹쳐졌다.

삼나무 사이로 난 틈새길을 지나 분화구 안으로 진입했다.

잡풀 우거진 채 누렇게 시든 그 위로, 삼나무 진녹색 무성한 잎새, 다시 그 위를 푸르게 에워싼 소나무는 생울타리 같았다.

다만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감이 생경스러웠다.

혹시 수천 년 전 불길 치솟던 기억이 각인돼 잔재로 남은 그 트라우마일까.

웬일인지 새들이 깃들지 않은 분화구.

아니면 새의 무대는 드높고 넓은 창천이어서 일지도.

기분 나쁜 고요가 괴괴하게 여겨질 법 한데 다행히 든든한 보디가드 덕에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빛 청명하다면 여기 서서 오래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목 뻐근하도록 고개 젖히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저 푸른 삼나무숲과 소나무숲 그 위로 펼쳐진 벽공에 혹여 구름장 흘러간다면 필시 눈에 물기 솟아오르겠지.

왜 우리는 이처럼 자연이 빚은 지고지선의 경계에 들면 감동 격해지며 감흥에 겨워 목이 잠기는 걸까.

아, 좋다 좋아! 오랜만에 순수한 감탄사 연발하며 오~~ 해피데이! 외치게 만든 아부오름 분화구.

한껏 초목 푸르른 철엔 어떤 모습일까 쉬 짐작이 안 가나, 내심 여름철 수국꽃 필 무렵 다시 오기로 작정했다.


아부' 명칭에 대해서는 앞오름 (阿父岳) 등등 여러 해석이 나와있으나 제주 방언으로 '아버지 또는 집안 어른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말이 가장 와닿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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