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
섣달 바람소리 데불고 오른 백약이오름이다.
막무가내로 소용돌이치는 바람과의 동행이었다.
멀리 하얗게 솟은 풍력단지 바람개비 윙윙 돌 거고 억새 가녀린 허리는 꺾일 듯 휘어진 채 나붓거리는데.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의 춤사위에는 광기가 실렸다.
마구 뒤흔든다. 영혼까지를.
불현듯 허허벌판에 서있는 느낌과 함께 한기가 스며든다.
어쩌면 나는 한겨울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바람을 기다려온 마른 가랑잎은 아니었던가.
그렇다, 미세한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는 마른 잎새.
내면에서 이는 뉘앙스 미묘한 감정선의 파동을 자신만은 안다.
아니 느낀다.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아릿하게 느껴진다.
감정의 일탈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게 자못 놀랍다.
노년기 깊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성향 감성적인 터라 예민하면서도 충동적인 기질 배제하기 어렵다.
작은 불씨에도 금시 타버리고 마는 위태로운 인화성 그 자체일지도 몰라 두렵다.
포르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낯선 허공을 유영할 기대에만 골똘해온 한심토록 가볍디가벼운 존재.
오십대로 영영 마감된 줄 알았던 심저의 격랑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생각사록 신기한 건 아직도 이글거리는 열정 그 불씨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나이 들어 감당하기엔 후유증 만만치 않아 버거운, 그래서 수시로 흔들리는 바람결에 내심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도.
모쪼록 단단히 다져진 절제력으로 방황 잠재우고 속히 안정 되찾게 되기를.
'백약이 무효'인 중증으로 전이되기 전 이 야릇하고 오묘한 증세를 초반에 다스려야 하리.
백약이오름에 왔음은 아무래도 내 안에서 나를 송두리째 휘감고 있는 바람을 다스리라는 무언의 계시 같기만 하다.
100가지 약초가 있는 오름이라?
약초가 많이 자생해 '백가지 약이 나는 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었겠다.
산세 넉넉해 백약을 두루 품고도 남을만해 보였다.
그렇듯 百藥岳은 참 편안해 보였다.
둥글넓적한 굼부리를 가진 원뿔 모양의 오름이라 면적 꽤 넓은 편이며, 둘레는 3,124m에 높이 356.9m이나 등산 고도는 약 100m로 야트막한 수준이라 비교적 걷기 만만한 오름이었다.
둥근 분화구 안에는 초피, 방아풀, 떡쑥, 고비, 참마, 복분자, 청미래덩굴, 하눌타리, 층층이꽃, 향유 같은 약초가 자라며 가을부터는 억새가 볼만하단다.
과거 제주민들이 장만해 놓고 겨울철 내내 먹던 상비약 ‘百草湯’은 여기서 채취한 약초를 가마솥에 넣고 오래 달여서 두고두고 복용했다고.
표선면 성읍리에 위치했으나 송당 산간에 숨은 백약이오름, 벌써부터 이름에 혹해 가보려고 벼려온 터다.
딸내미가 본초학 강의를 맡기도 했기에 한약재에 관심이 가 닿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운영하는 서귀포 생약누리 전시장에 들러 눈으로 약초 종류를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 한복판인 섣달 백약이 오름은 풀잎 죄다 시들어 누렇게 누워있고 천지 사방에 메마른 바람소리뿐이었다.
푸른 기운이라면 사철 청청한 소나무 담장처럼 둘러섰으며, 저 아랫동네 당근밭떼기만 초록 일색이었다.
하여 감상할 거리는 전망뿐, 낮은 키에 비해 조망권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다만 하늘빛이 받쳐주지 않아 유감이었지만.
서귀포 거처에서 떠날 즈음, 해 밝고 창공 푸른 청명한 날씨였는데 비자림로에서 금백조로에 접어들면서부터 금방이라도 빗방울 뿌릴 듯 꾸무레해졌다.
이는 오롯이 하늘의 소관사, 폭우 쏟아진들 어쩔 것인가, 불평은커녕 이 정도만으로도 감사하다.
우산을 챙길까 하다가 두고 오길 잘했다.
패딩재킷 지퍼 올리면 그만인 바람만 거칠 따름이다.
평탄한 길이라도 좀 걷자니 겹겹이 껴입은 옷차림 부둔해 나중엔 옷섶 풀어헤쳤지만.
산기슭 오르기 시작한 처음엔 발아래 여기저기 오름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한 치씩 고도가 높아질수록 신기하게 변모하는 전망.
높은 오름, 보미오름, 돌리미오름, 개오름이며 지미봉이 마주 보이다 어느 고도에 이르면 먼바다에 뜬 우도와 성산일출봉까지 뻗어가는 가슴 뛰는 절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층계 약간 디디고 십여 분만 오르면 이처럼 벅찬 감동 선사해 주는 풍광에 매료, 자꾸만 뒤돌아 서곤 하게 만든다.
굼부리 흘깃 내려다보고 나서 도도록 솟은 언덕에 올라서자 더욱더 장관이다.
서쪽으로 비치미오름과 성불오름, 큰사슴이오름을 지나 붉은오름, 물찻오름, 성널오름이 받들어 뫼신 한라산 아스라하다.
부대오름, 거문오름, 부소오름, 안돌오름, 밧돌오름, 체오름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 북쪽의 멋진 실루엣.
파도치는 오름 능선 둘러보며 마냥 혹해있는 바람에 분화구 둘레길은 놓치고 말았다.
산길 오르는 중간중간에서 기다리는 친절한 산행 안내도라도 눈여겨봐뒀어야 했는데....
이번 탐방 시만이 아니라 미리 정보검색 꼼꼼스레 해버리면 막상 대상과 마주쳤을 때 감흥도가 떨어져, 거의 매번 나는 무턱대고 생짜배기로 탐방을 하며 이런 우를 자주 범한다.
그래도 좋은 것이, 새로운 대상과의 만남은 날 것이 주는 신선한 기대감과 설렘이 따르기에 감동 더욱 크기에.
다시 가보기 어려운 해외라면 복구 불가이나 제주섬 안이라 안타까울 거도 없다.
이제 길눈도 트였으니 초장에 마소 뛰노는 봄날에 다시 찾기로 한다.
그땐 모든 게 원 위치로 돌아가 마른 잎 스치던 바람의 숨결 희미해져 있으리니.
성주괴공, 한 생각 일어나 잠시 머물다가 마침내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느니.
특이하게도 백약이 오름은 들머리와 출구가 한 곳인 원점회귀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