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교사이셨던 작은 아버지는 우리 자매를 유난히 귀애했다. 아주 어릴 적인 대여섯 살 무렵, 내 손을 잡고 점방에 간 작은 아버지는 먹고 싶은 걸 고르라 하셨다. 저고리 옷고름만 돌돌 말고 서있는 나 대신 작은아버지는 주섬주섬 과자를 좌대에서 골랐다. 밀가루 부대 종이로 만든 누런 봉지 안에는 센베이 요깡 미루꾸 껌 왕사탕이 들어있었다. 그때 첨으로 요깡을 먹어봤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질감의 그 독특한 것은 사르르 녹으며 연한 단맛으로 입안을 행복하게 해 줬다. 팥으로 만들었다는 건 먼 훗날 알았고 어쨌건 듬성듬성 밤 알갱이가 씹히는 요깡은 그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 되었다.
이민을 갔다가 여섯 해 만에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던 오래전. 공항에서 아들은 눈가가 붉어졌다. 원래도 수척했지만 바싹 마른 엄마가 속상해서였으리라. 집에 와보니 내 방 머리맡에 요깡과 웨하스가 한 보따리 기다리고 있었다. 말 안 해도 알 만했다. 평소 내가 즐겨온 군것질거리였기 때문이다. 용케도 기호를 잊지 않았구나 싶어 내심 짜르르 해졌다. 며칠 전 아들이 뜬금없이 선물 포장지에 든 양갱 케이스를 보내왔다. 열어보니 다식판에 찍어낸 흑임자다식이며 송화다식처럼 참한 모양에 색상 은은한 요깡이 얌전스레 들어있었다. 뜬금없는 게 아닌 것이, 민속날이면 전통음식 챙기는 줄 알기에 동지 즈음 팥양갱을 일부러 사보낸 듯. 녹차양갱은 녹차를 곁들이면 딱이겠다.
요깡이라 하니까 젊은이들은 양갱을 왜 자꾸 요깡이라 하나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양갱(羊羹)은 양의 피로 만든 중국 제사 음식에서 유래한 단어다.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 승려들이 양갱을 일본에 들여왔지만 육식 금지인 계율 상 양고기 대신 팥을 사용해 양갱 분위기를 내면서 사찰음식으로 자리 잡은 양갱. 이후 서양에서 설탕이 들어와 달콤한 양갱으로 변신했다. 다도가 유행하던 에도시대 양갱은 차와 함께 즐기는 와가시였다. 본적이 그러하듯 짱깨보다는 토착 왜구로 몰릴지라도 차라리 추억 오롯한 이름이 나는 훨 낫다. 요깡은 이처럼 중국에서 만드는 법이 일본에 전해져 단맛을 첨가해 별식으로 정착되었고. 붉은팥 소에 우뭇가사리인 한천(寒天)과 설탕을 녹여 잘 개어 가며 굳힌 연성 과자로 수분이 적어 저장하기도 좋다. 마카롱 같은 서양 디저트를 대신할 수 있는 양갱으로 주목받으며 귀하신 몸으로 한창 떠오르는 요즘이다. 팥, 한천, 설탕만 준비하면 요샌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정도라 레시피도 흔하다.
내일 22일은 예로부터 설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온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민속 명절인 동짓날이다. 24 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인 동짓날. 동지가 드는 달은 '동짓달'이라 칭했다. 작은설이라 불리는 동짓날에는 자연스럽게 팥죽이 따라붙게 마련. 하지만 올해는 애동지라 팥죽은 먹지 않고 팥 시루떡을 먹는 날이다. 왜 그럴까? 애동지는 음력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 초순에 들었을 경우, 중동지는 중순,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 부른다. 애동지 혹은 애기동지는 집안의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도록, 펄펄 끓는 팥죽보다 김으로 찐 팥시루떡을 대체재로 활용한 듯. 아무튼 동지는 액을 물리치는 붉은팥이 든 음식을 먹는 날, 전염병과 모든 재액을 막고 새해 건강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팥죽이나 팥시루떡이다.
동지는 겨울이 최고점에 이른 날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다시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말하자면 해가 소생하는 날인 동짓날이기도 하다. 태양이 부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작은설' 혹은 아세(亞歲)라 불리는 동지. 선대들은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 하였기에 팥죽 속에 든 찹쌀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기도 했다. 보통 윤달이 든 해는 애동지가 찾아온다. 유월에 윤달이 들었던 올해였다. 덤으로 얻은 달이라 하여 '덤달'이니 '공달'이라 불리는 윤달에는 불공을 드리면 극락에 가므로 수의를 만들어 두기도 했다. 특히 아무 날이라도 손없는 날이라서 이사를 하거나 화장을 위한 이장을 해도 탈이 없다고 하였다. 한편 천문학상으로 북반구에서는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아져, 한해 중 밤 길이가 최장에 달한다. 그러하기에 음(陰)의 기운이 가득해서 원혼이 활동하기 좋은 날이라 여겼던 동지. 때문에 양(陽) 기운이 강한 붉은팥으로 죽이나 떡을 해서 잡귀를 쫓아버리는 풍습이 전해 내려왔다. 따라서 팥으로 만든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 기원과 소망이 담긴 별식인 셈이다. 엄마 때만 해도 동짓날 아침 집안 곳곳에 팥죽을 뿌려 부정을 물리치고 복을 구함으로써 가족의 건강과 가내 안녕을 염원했던 붉은팥이다.
요샌 이런 거 굳이 따지고 가려서 먹는 세월도 아니며 요즘 사람들 이에 구애받을 리 만무다. 그래도 기다림의 간절한 심정을 형상화한 이 시조는 알 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어/
춘풍 니불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읊은 황진이가 새삼 떠오르는 날은 아닐지. 여하튼 예전부터 전해지는 전통 민속날인 동지조차 이제는 구세대나 챙기는 날이 되어버렸다. 동의보감에 `적소두(赤小豆·붉은팥)를 달여서 죽을 쑤어 먹으면 심규(心竅 심장 작용)를 열어 마음속 답답함을 풀어준다`고 전하니 꽉 막인 정국이라는 세사로 인해 갑갑한 속을 풀고자 한다면 팥죽을 찾을 만도 하다. 저물녘쯤 올레시장에 가 푸짐하게 김 오르는 떡집에 들러 팥 시루떡을 사 오려한다. 기왕이면 호박고지 시루떡이나 무시루떡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