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추사 유배지에 왔을 때 적소 앞집 담벼락에 그려진 수선화부를 보았다.
당시는 기념관이 임시 폐쇄된 상태라 전시실은 들어갈 수가 없어 노랗게 익은 탱자가 있는 적소만 둘러보았다.
초가집 둘레와 집 앞 높다랗게 이어진 대정 성벽 아래로 그때 소복소복한 수선화 싹이 한 뼘쯤 돋아있었다.
한겨울이라도 그다지 춥지 않은 서귀포라 들녘 어디나 지천으로 퍼진 야생 수선, 파내고 파내도 솟아나 농가에선 천덕꾸러기다.
암튼 수선화 필 때 다시 와야지 내심 궁구렸던 대로 때마침 수선화 철이라 추사유배처를 거듭 찾았다.
이번엔 추사가 남긴 수선화 그림 탁본도 보았고 한들거리며 피어난 토종 수선화 얼굴은 얼마든지 마주할 수가 있었다.
제주도에선 이렇듯 외출하기만 하면 매번 흔감스런 선물을 한아름씩 받곤 한다.
한라산 봉우리는 은관을 쓴 듯 눈 쌓여 하이얀데 서귀포는 봄날씨라도 눈발 휘날리는 정월달, 눈 속에 핀 설중수선이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一點冬心朶朶圓)
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品於幽澹冷雋邊)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梅高猶未離庭砌)
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신선 너로구나(淸水眞看解脫仙)
충남 예산의 김정희 종가 유물 중 하나인 추사의 칠언시 ‘수선화(水仙花)’는 보물 제547호다.
그러나 탁본 속 수선화부(水仙花賦)는 아깝게도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시를 옮겨 적은 것이다.
눈서리 찬 깊은 겨울에도 변치 않는 선비의 지조와 청렴을 수선이 상징하듯 세한도 역시 의미 자못 유현해 그 경지 짐작하기 쉽지가 않다.
족자로 꾸민 추사선생 필체/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소치 허련이 그린 초상화/선생이 남긴 비문의 탁본
완당필첩
시정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누각이란 뜻의 시경루는 추사 가문의 원찰인 화암사의 현판 탁본/시례고가는 시와 예가 있는 고풍이 있는 집/창문으로 비치는 작은 빛이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소창다명사아구좌
충남 예산 화암사 뒤 병풍바위에 새긴 해서체 각자로 천축국 부처님이 계신 곳이란 뜻
이날 전시실 주제는 무지개가 달을 꿰니..... 어찌해 밤에 뜬 무지개일까.
이는 비 내리는 달밤 적소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써 내린 시구에서 땄을까.
비 온 뒤 생기는 무지개인데 달빛이 있어서 달을 꿴 무지개가 눈에 띄었을까, 아니면 심상이었을까.
아직껏 달밤에 내리는 비는 본 바가 없어서 그 정서 짐작할 길 없지만 단지 우중 적소에서 느낄 추연한 감회만은 헤아려졌다.
혼잣속으로 온갖 서정 어린 상상을 동원해 가며 소설 한 편 엮어나가다가 설명문을 읽고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무지개가 달을 꿰니, 란 제목은 그러나 중국 송나라 황정견이 지은 시에서 유래했다는 걸 눈치채자 아쉽기 그지없었다.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와 큐레이터의 의중이 분명 있긴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 없으니, 쩝!
하긴 그의 서예작품이 중국 미술품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기도 하니 뭐...
비록 소식에게서 시를 배우고 두보의 영향을 받았다는 옛날 고릿적의, 걸출한 시인 묵객인 그와 추사와의 연결점이 있다면 담백한 기풍일까.
특별 소장품 전을 열면서 추사 선생이 남긴 편지글이나 시어에서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거늘 세계화 시대일지라도 하필 중국이라니....
이번 전시회에서 세한도를 보고 놀란 것은 그간 단지 세필로 그린 자그마한 수묵화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겨울이 되어 날씨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의미의 그림.
그림 바로 옆에 제자 이상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 글이 딸린 거야 당연하다.
어려운 처지가 된 자신을 잊지 않고 머나먼 중국을 다녀올 적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바다 건너까지 수차 보내준 이상적이다.
그 외는 당대에 뛰어난 중국 학자 13인과 한국인 세 명이 단 발문이 줄줄 달려있어서 그 길이가 무려 10m 넘는 길고 긴 두루마리 형태였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고 무척 감격해 자신이 한번 더 중국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갖고 가 중국의 여러 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적과 김정희와의 인간적인 의리에 감동하여 그림 끝부분에 자신들의 느낌을 덧붙여 나갔다.
발문을 단 한국인 세분은 누구나 익히 알고 존경하는 민족사학자 정인보 선생,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 박사,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었다.
*추사 전시관에 전화 걸어 학예사께 문의해 본 결과, 추사의 글씨들이 황정견의 싯구에 나오듯 무지개가 달을 꿴 듯 아름답고 보배로워 차용했다고.
위로부터 세한도와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수선화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고, 풍사실이란 현판 뜻은 마음이 넉넉한 선비가 사는 방이라 한다.
탑광실은 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방이란 뜻, 판전은 추사가 눈 감기 사흘 전 마지막으로 쓴 봉은사 편액, 예산 화암사 중창에 맞춰 써 보낸 무량수각 편액으로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행서체로 쓴 홍도촌사 탁본은 서로를 그리는 집이란 뜻, 창문으로 비치는 작은 빛이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의미의 소창다명사아구좌,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빈 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도 절로 핀다란 뜻으로 법정스님이 생전 거처를 수류화개실이라 칭했다.
여균사청은 푸른 대나무와 같은 청렴함을 말하며 추사가 평소 누구에게든 훈계의 뜻으로 써준 글귀, 육영당은 영재를 길러내는 집이란 의미이며 시례고가는 시와 예의 고풍이 흐르는 집이라고.
맨 아래 유재는 추사의 제자 남방길의 호로 남김의 정신을 강조하며 내렸고 천개사경편은 자연의 한적한 정취 읊은 한시를 부채 글씨처럼 펼쳐보였다.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의 호를 쓴 김정희 선생.
평생에 걸쳐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치열하게 서도에 천착했기에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추사.
영조 임금이 자식 중 특히 귀애한 화순옹주가 추사의 증조모이며 추사 자신도 효명세자의 사부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도 초년에는 그의 문하생.
한마디로 한양에서도 내로라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던 쟁쟁한 가문의 사대부로 소년기부터 시서화에 두루 능했다.
익히 알고 있듯 추사는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학 통해 사실로 증명한 고문 판독 분야의 개척자이자 금석학의 대가인 선생이다.
정조 때 태어나 철종 때 별세, 병조판서를 부친으로 둔 명문가 출신이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가나 도중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겪는다.
조선의 고질병인 사색당파 싸움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와 8년, 또 말도 안 되는 예송 논쟁에 휘말려 함경도 북청에서 삼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제주 적소에서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인 추사체를 비롯 꾸밈 배제시킨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서권기 넘치는 세한도를 남겼다.
노경에는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는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불가에 입문했다가 그해 눈을 감았다.
세상을 뜨기 사흘 전 마지막으로 쓴 글이 봉은사 '판전' 두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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