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사락사락 눈 내리더니 설문대할망 목덜미까지 분 단장 고르게 한 아침.
새하얀 너울 드리운 한라산, 아직은 설한풍 시린 정월이지만 하늘 푸르러 외출 준비를 했지요.
추운데 어딜 가려느냐고요?
서귀포 도로변 곳곳에서 수선화를 만났더랍니다.
수선화가 피기 시작했다니 홀연 추사선생 뜨락이 생각나더군요.
이번엔 적소로 직접 찾아뵙는 대신 사계리부터 대정으로 이어지는 추사 유배길 따라 걸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산방산 앞에서 차 내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용머리해안 암벽 쓰다듬으며 빙 둘러본 뒤 유채꽃에도 홀려보고,...
사계해변 거쳐 마늘밭 무밭 질펀한 밭둑길 풀향에 취한 채 걸어갔지요.
이름하여 '사색의 길' 일부를 '사유 혹은 명상' 도반으로 삼아 데불고서요.
그때까지만 해도 결기 시퍼러이 살아있던 추사는 거친 돌팍길 걸으며 불평을 했다지요.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벼락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비단 도포에 기름진 음식이 일상이던 양반님네였으니까요.
명문가 출신인 데다 병조참판 위치에서 당쟁의 옥사에 연루되어, 바다 건너 고도로 귀양 오게 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추사 김정희.
1840년, 치도곤까지 맞고 한양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추사선생은 제주 서남쪽 끄트머리 대정현에 도착하였지요.
때는 하늘빛 차디찬 구월이었습니다.
멀리 한라산 바라보며 자태 또렷한 산방산 거느린 채 사계 마을 마늘밭 양배추밭 사잇길 휘적휘적 걸었지요.
삼동 한가운데라 역시 스치는 바람 맛 맵싸했습니다.
모자 푹 눌러쓴 다음, 코트 깃 한껏 추슬렀네요.
명문거족 귀하신 몸이 죄인 되어 무명옷에 짚신 끌며 터덜터덜 걸을 때 심사가 꼬이다 못해 얼마나 뒤틀렸을까요.
안하무인이던 그는 평소 조롱과 독설 서슴지 않았던 까칠한 성정이니 더더욱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니었겠어요.
나라님이 내린 국법 지엄하니, 들끓는 화기 속으로 꾹꾹 눌러 다지며 삭혀야 할 그의 심사야말로 시끌복잡했겠지요.
산방산이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시야 가득 바굼지 오름이 채워지더군요.
단산 지키는 방사탑 스치면 저 끄트머리 짬에 대정 향교는 자리하고 있을 터였습니다.
밭둑 마른 풀이라도 태우는가, 들판에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어요.
향교 윤곽이 드러날 즈음, 차도와 마늘밭을 경계 지른 돌담 바윗전에 전각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예와 금석학의 대가였던 그의, 눈에 익은 예의 추사체 전각이 연달아 이어지더군요.
김정희는 호와 자가 무려 200여 개에 이른다고 하지요.
당시엔 본명 외에 ‘아명’이 있었고 성인식 때는 ‘자’를 받았으며 그 뒤에는 일상에서 ‘호’를 썼는데요.
또한 서재 등 자신만의 공간에 이름을 붙여 당호로 쓰기도 했지요.
이런 호사 취미는 주로 문필가 집단에서 성행한 풍조였대요.
자세 기우뚱 유지한 채 손 시린 줄도 모르고 거푸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밭일하던 노인이 허리 펴고 서서 한참을 멀거니 바라보기에 민망스러워 가던 걸음 얼른 재촉했네요.
세상 천재들 가소로이 여기며 오만하기 짝이 없던 청장년기 거쳐, 나이 쉰 중반에 들어 김정희는 그렇게 절해고도 귀양객이 되었지요.
적소에서도 입맛은 살아있어 육포에 민어포에 호두며 잣, 심지어 인절미까지 아내는 철철이 챙겼다네요.
배편으로 오는 도중, 반 너머는 상하거나 썩어버렸을지언정.
허나 시퍼런 바다에 둘러싸인 외딴섬의 막막함 견디며 그는 비로소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깎아낼 수 있었어요.
9년 남짓의 세월, 대정에서 위리안치형을 감내하면서 생애 역작인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는데요.
글은 그림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게 된 사연이라 하듯, 세한도에는 그림에 곁들인 글이 들어있지요.
메마른 선으로 그린 소박한 집 한 채와 그 좌우를 지키는 노송과 잣나무가 대치되게 서있는 스산한 그림 세한도.
각고의 신산스런 시간을 거쳐 통렬한 자기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마침내 내면세계와 글씨가 공히 완숙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세한도는 대정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1844년,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이 완당(阮堂)에게 보낸 선물에 대한 답례로 보낸 그림입니다.
궁벽한 처지 되어 귀양살이하는 자신인데도 스승의 연 잊지 않고 진기한 책을 보내주는 제자가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추사가 보고 싶어 했던 중국 책을 어렵사리 구해서 보내준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던 편지가 세한도이잖아요.
짙은 먹물만을 사용해,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고고한 절개를 표현한 세한도.
문인화의 진수로 평가받아 현재 국보 180호가 됐지요.
오른쪽 늙어 기울어져가는 소나무를 왼쪽 젊은 소나무가 받쳐 주며 더불어 곧게 서서 간결한 집 배경이 되어 준 그림.
추사는 그림 왼쪽에 적혀있는 해서체의 화발(畵跋)에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 보냈습니다.
.. 전략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길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라 하였다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외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쫓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 하셨소.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다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 잣나무 이외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오.
... 후략
이 편지를 받잡은 이상적은 감루를 금치 못했다지요.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중략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 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후략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 조진조 진경용 등 16인과 자리를 함께한 다음 <세한도>를 내보였답니다.
그들은 세한도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 간의 소중한 인연과 인간적 의리에 감격하였지요.
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써 내렸습니다.
이상적은 이 글을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에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어드렸고요.
그 후에 추사의 문하생이었던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정인보의 그림 감상문이 뒤에 붙여졌다네요.
세월이 한참 흘러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에게 전해졌다가 최초의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교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지요.
종전 직전, 폭격기 공습이 잦은 동경으로 위험 무릅쓰고 찾아간 서예가이자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 선생 덕분에 세한도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거액을 들고 가서 석 달여 우여곡절의 협상 끝에 가까스로 세한도를 손에 넣었으나, 정치하다 자금 압박을 받아 손세기에게 넘겼고요.
손세기의 장남인 손창근은 세한도를 소장하다가 이를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몇 해 전, 178년 만에 세한도는 제주국립박물관에 돌아와 잠시 추사 특별전을 연 바도 있습니다.
자색 양배추밭을 가로질러 향교에 이르렀습니다.
전에도 오후녘에 왔었는데 이번 또한 기와지붕에 기우는 햇살 불그레 어리인 시각.
해설사의 말마따나 경내 우람한 고목과 현판 글씨체 빼고는 다 근자에 새로 들어섰다는 게 수긍이 가더군요.
원래 세종 2년에 설립돼 대성전· 명륜당· 대성문· 동재·서재· 실하게 들어선 향교였다고 합디다.
하건만 현재는 건물 형태로 미루어 철저한 고증 없이 엉렁뚱땅 급조된 어설픈 복원품처럼 가비얍게 보이더라고요.
지난여름, 돌감나무 자잘한 풋감을 매달고 있더니 지금은 홍시 되어 뭇새들에게 쪼여서인지 속이 빈 채 쭈글텅했어요.
그래도 추녀 아래 줄지어 핀 수선화 반가웠답니다.
천재는 하늘이 낸다고 하지만, 그에 걸맞게 자신의 피나는 노력 또한 따라주어야 대성하겠지요.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닳게 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피력한 대로 그만큼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해 왔습니다.
적소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오로지 붓에 의지한 채 처절한 귀양살이의 고독과 절망감을 다스렸던 겁니다.
그뿐 아니라 한마장 거리인 대정 향교에 나가 그는 지방 유생들에게 글과 서예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추사가 손수 썼다는 해서체 '의문당' 현판(진품은 대정읍 추사관 소장)이 걸린 동재를 한참 올려다보았습니다.
학생들 기숙사 격인 동재에 '의심 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 새긴 그분 뜻이 무엇이었겠나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항상 깊이 참구하고 곰곰 숙고하여 의심 들면 질문하며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였겠지요.
그를 흠숭하며 따르는 문하생이 하도 많아 "추사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 역시 과장만은 아닐 터.
흥선대원군을 비롯 이상적· 강위· 허련 같은 대가를 제자로 둔 추사선생, 적소에서도 숱한 이들이 문하로 모여들었다지요.
강기석· 강도순· 김여추· 김좌겸· 이시형· 홍석우 등은 이때 글을 배우러 찾아온 제주 각지의 선비들이었답니다.
그들은 향후 19세기 제주의 인문학과 문예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지역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황폐한 외딴섬 탐라의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게 된 연유가 아마도 여기 있을 겁니다.
해동 제일의 서성(書聖)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선생.
추사체가 향교 뒷산인 거친 단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도 하는데, 변화무쌍 기괴한 필체에 그 설명이 있을 법 하나 글쎄올시다.
대성문 옆에 비스듬 서있는 아취 띈 소나무는 세한도 그림 속 헐벗은 소나무의 모델이라고도 하는데 이 점도 글쎄올시다.
물론 대정마을과 추사를 깊이 연계시키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되지만요.
추사체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의 한자 필체 5체에 더해 추상화 같은 옛 글자까지 취합해 자유로이 구사하는 게 특징이라 하지요.
숫제 글씨를 갖고 노는 유희의 경지에 이르렀던 걸까요.
속기나 기교가 없는 고졸한 기운이 배어든 가운데 불현듯 툭 치고 들어오는 파격미가 추사체라고들 하지요.
추사의 글씨는 워낙 남겨진 양이 방대해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그만큼 위작 논란도 많은 편이래요.
향교를 뒤로하고 서둘러 총총 추사관에 이르렀을 때는 저물녘.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마음이 급했습니다.
유배처를 휘리릭 돈 다음 추사관 역시 대충 훑어보고 나왔답니다.
사진 몇 장 찍고요.
진작에 수 차례 다녀온 곳이긴 하지만 집에서 좀 더 일찍 나설걸, 아쉬움도 일었습니다.
추사 선생은 너무도 대단한 거목이라 어느 가지 하나만 잡고도 풀어낼 이야기가 무진장인 반면 그래서 더더욱 오리무중, 여전 의문부호만 남습니다.
시·서·화에 두루 빼어났지만 특히 난을 잘 쳤다는 그분인데요.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 난을 그리고 싶다 하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을 치려거든 손재주보다 문자향 서권기부터 가슴에 담으라 일렀다지요.
하지만 난 그림 옆에 빼곡하게 글씨를 담아 머슴에게 내린 '부작난'에 이르면 선생의 뜻을 어찌 섣불리 헤아리랴 싶네요.
과문한 저로서야 짐작조차 도통 어렵기만 합니다.
추사관 선생의 흉상 앞에 한 아름 꽂혀있던 싱싱한 수선화는 향기 한층 싱그러웠지요.
수선화 미묘한 향이 내동 따라오는 느낌이라 그 향기 품어 안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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