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을 내려와 알뜨르 비행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크투어리즘으로 제법 뜨고 있는 알뜨르 비행장은 별도로 다뤘으니 제쳐두고, 너르게 펼쳐진 밭고랑 사잇길 내처 걸어 나갔다.
지난번엔 주변이 너무 괴괴해 눈도장만 팍 찍고 돌아선 섯알오름을 둘러보고자 함이었다.
일제가 이 지역을 군사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였던 오름이 몇 년 후 무지막지한 학살터로 변하고 말았다는데.
섯알오름 인근 밭 가장자리에도 동굴진지가 숨어 있기에 설명문을 읽어보니 제주도 내 진지동굴 중 가장 규모가 큰 격자형 미로 동굴이라고.
어마무시하게도 전투 사령실이 있었고 중요 군사시설인 비행기 수리공장이 있던 요새 중의 요새였다.
붕괴 위험이 있어 폐쇄 조치했다는 노란 경고 쪽지가 철문 양쪽에 달려있어, 폐기 처분된 방사능 물체라도 있는 듯 섬뜩해 냉큼 물러났다.
브로콜리며 양배추 무 마늘 유채꽃밭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사방에 너르게 펼쳐져 있으나 살벌한 전투기 격납고와 동굴진지가 이웃한 이곳.
마침 해설사를 대동한 단체 답사팀이 학살터에 대한 설명을 듣는 중이라 곁다리로 궁금한 점은 질문하기도 했다.
4.3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 즈음.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상이 의심스러운 불순분자를 미리 색출하는 예비검속법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보도연맹 등 요시찰인을 마구잡이로 잡아와 집단 총살하여 암매장해 버린 무참한 사태가 모슬포 관내에서 발생했다.
폭탄 창고 터였던 섯알오름의 정상부에 두 개의 포진지를 구축했던 일제였으나 패망 후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시설물은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무자비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
유족들의 호소에도 이후 7년 동안 인근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어뒀다가 유가족들의 끈질긴 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뒤늦게 유해를 수습했다.
비록 명예는 회복됐다지만 대다수, 뜻도 모르고 연루된 이데올로기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초들의 한과 그 가족의 비통을 뭘로 보상할 수 있으랴.
그러나 한편으론 쌀 속에 피가 섞이듯, 양 무리에 염소가 끼어들듯, 무고한 다수 안에 혹여?
일부분 아마 그런 의혹이 전혀 아니 들 리야 없었으리라.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 생명의 가치보다 덜한 건 결코 아니지만....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대립 더 극명해진 보수 쪽 우와 자칭 진보인 좌. 과연 누가 찐 애국자이며 민족의 미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주 단순 명료하게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난국 정리돼 선거가 치러질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그 넘이 그넘 같으니 뉘반지기 속에서 진짜 알곡 건져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에 하는 소리다.
오전에, 돌아온 스트롱맨 트럼프 대통령의 열정적인 취임사를 들었다.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미국의 황금기를 약속하며 희망과 번영 평화를 되찾겠다고 선포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후대에 기억될 훌륭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된다는 것은.
왜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그 멋진 자리에 올라가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 쌓기는커녕 일신 보전마저 못하나?
어쩌다 운이 좋았던가, 한두명 있기는 있었으나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다.
제 한몸 국가라는 제단에 기꺼이 바치겠다는 열정과 결기로 직에 올라도, 뜻을 옳게 펼칠 수 없는 정치구조.
하긴 주관없이 선동질에 놀아나 놔화부동, 판단력 낮은 민도가 문제다.
끝도 없이 꼬리를 이어가는 뭇 상념들.
그렇게 생각에 파묻힌 채 되짚어 걷다 보니 어느새 모슬봉이 보이는 유채꽃길 지나 산방산까지 와버렸다.
그새 유채밭 볼만해진 곳도 여러 군데다.
사계리 마을 카페뿐 아니라 사하촌 불 환히 밝혀졌고 어둠살 짙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무진무진 도대체 얼마를 걸은 거야? 셈해보니 그제사 슬그머니 다리가 뻐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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