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배형은 사형 버금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중에도 멀고 먼 절해고도로 유배와 위리안치되는 형은 중한 죄인이 받았다.
귀양 간 거처의 울타리를 가시 거친 탱자나무로 돌려 거주지 제한을 두어 유폐시키던 형벌이 위리안치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드라마로 잘 알려진 '자산어보'를 남겼다.
유형지에서 송강 정철, 서포 김만중, 다산 정약용 역시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유배문학을 꽃피웠다.
그처럼 다산도 여기에서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된 문인화 세한도를 남겼다.
외로운 섬에 귀양 간 추사에게 제자 이언적은 북경에 다녀올 적마다 귀한 서적을 구해 제주로 보냈다.
이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붓을 들어 네 그루의 나무와 집 한 채를 화폭에 담았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뜻의 세한도였다.
또한 근 9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쳐 사회교육적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차를 유독 아낀 추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선사와 평생을 교류하며 제주지역에 차나무를 심는 등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였다.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의 증손으로, 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 자리에 있었다.
헌종 6년,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로 떠나려던 중 외척세력의 배척을 받아 제주도로 밀려났다.
유배처였던 강도순 가옥은 밖거리(바깥채), 안거리(안채), 모거리(별채)와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밖거리로 유생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켰는데 '추사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처럼 여기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추사는 모거리에 기거하며 유배처에서의 비분강개한 심사를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유배지가 위치한 대정 현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고자 쌓은 대정현의 높고 긴 성벽이다.
단종 복위를 꾀했던 금성대군은 형 세조로부터 내쳐져 순흥으로 귀양 와 위리안치되었다가 끝내 처형당한다.
영주에 갔을 때 금성대군 신단을 찾았으나 옛 흔적은 가뭇없었다.
해서 아직껏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진 유배처를 본 적이 없었다.
대정성지를 가려고 대정고을 찾았다가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추사 유배지부터 들어갔다.
마침 탱자 샛노라니 익어 제풀에 떨어지고 차꽃 하얗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절기였다.
서귀포시 대정 읍성 동문 자리 안쪽에 자리 잡은 추사 유배지는 조촐한 초가였다.
기념관은 문이 굳게 잠겨있었으나 사적 제487호인 유배지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거기에서 조밀하게 얽히고설킨 가시 담,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울타리를 만났다.
시, 서, 화에 능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추사는 왜 유배를 당했을까.
권력 다툼의 정쟁에 휘말린 추사는 안동 김 씨 외척세력으로부터 대역죄인으로 몰려 제주에 유배된다.
명필에다 뛰어난 문장가요 금석학의 대가였던 그는 효명세자와 함께 선진문물을 흡수해 사회를 새롭게 세우려는 개혁가였다.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적장자이자, 제24대 왕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뜻밖에도 스물둘 창창한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개혁세력은 동력을 잃었고 조선도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
그 저간의 흑역사는 드라마에서 다뤄진 대로다.
젊은 그가 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을 쇄신, 왕권을 강화하려다 급서 하므로 그의 꿈과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동시에 수구세력으로부터 제거대상이 된 추사.
추사 김정희(1786~1856년) 선생.
생몰연대를 짚어보면 그분 삶의 궤적이 어떠했을지 헤아려지고도 남는다.
명문가 출신이며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예술가로 조선 문인화의 깊은 경지를 연 추사.
그러나 사색당파에 더해 왕실 외척세력이 발호하며 혼란으로 치닫던 후기 조선사회에서는 그도 한갓 시대의 불쏘시개이자 희생양이 돼야 했다.
아홉 해에 걸친 제주도 유배에 이어 북청으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1852년부터 1856년 10월 10일 별세할 때까지 과천에 머물면서 마지막 예술혼을 꽃피웠던 추사선생이다.
생부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청계산 아래 마련한 과지초당은 묘막(墓幕)이었던 곳으로 말년을 여기서 은거하다 눈을 감았다.
과지초당에서도 추사는 붓을 들어 무르익은 예술세계를 펼치므로 25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그중에서도 추사의 회화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작 세한도와 더불어 국보 지정이 예고된 '불이선란도' 일명 부작란(不作蘭)은,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난초 그림.
초당에서 지낼 당시 시동처럼 먹을 갈아주던 달준에게 그려준 서화작품으로, 추사의 그림과 추사체 글씨를 동시에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사찰의 불이문이 그렇듯 발제는 선과 악, 삶과 죽음, 미와 추, 이 모두의 본질은 둘이 아니라 하나란 의미.
이 작품엔 유다르게도 추사가 낙관을 다섯 번이나 눌렀고 그 외 여러 인장은 소장인과 감상인이 찍은 것이라고.
‘불이선란’은 시동 손에 들어가기 전, 그림을 탐낸 전각가 오규일의 품을 거쳐 김석준~장택상~이한복~손재형~이근태~손세기~손창근 소장가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특히 서울 봉은사의 대장경을 보관하는 판전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인 판전(板殿)은 눈 감기 사흘 전에 쓴 글씨로 추사의 마지막 절필(絶筆)로 알려졌다.
추사가 어린 시절에 쓴 글씨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하여 ‘동자체(童子體)’라고도 전해지는 판전(板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