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잠을 깼다.
계속되는 재앙적 수준의 이상기후, 무더위가 밤까지 이어지며 열대야로 숙면을 취하기 어려운 요즘이라 잠도 설친다.
해가 뜨자 하늘 짙푸르러 지며 뭉게구름 띄운 앞바다 물빛 아름답고 뒤편 한라산 웅자 명징히 드러난다.
최고 기온 34도인 어제.
신창 사는 친구가 팔순을 맞아 온 가족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가 돌아왔길래 점심을 접대하려고 중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식사 후 피서 차 천백고지를 다녀올 계획이었다.
서귀포보다 기온이 7~8도 낮아 한여름 아무리 폭염이 기승부려도 서늘한 천백고지다.
보양식 백숙으로 야물게 속 채우고 식당을 나서자 후끈 단 아스팔트 복사열로 숨 막힐 거 같았다.
우리는 단박 행선지를 바꿨다.
가까운 천제연 폭포 시원한 물줄기 바라보며 편안히 쉬다 오기로.
그녀도 멀리 갈 거 없다며 수용했다.
한 코스 거리라 그늘 밟으며 걸어서 천제연으로 향했다.
비 흠뻑 내린 다음이 아니면 1폭포는 평소 주상절리 절벽에 폭포수는커녕 한 줄 물기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그래도 폭포 아래 고인 소(沼)는 용천수 솟아난 물빛이 마치 청잉크 풀어놓은 듯하다.
바닥 알 수 없는 심연이듯 깊디깊은 물속처럼 짙은 청남빛.
명주 수건 그 물에 담가두면 쪽 색깔 스카프 되련만...
전에는 물가까지 내려가 주상절리 매끈한 벽면 쓰다듬기도 했는데 이젠 전망대 시설을 만들어 놓아 내려가진 못한다.
층계 되짚어 올라 2 폭포로 가려니 길을 막아놓았다.
태풍이 오기 전 무성히 웃자란 나무 가지를 전지해 말리느라 통행로를 차단한 듯.
위쪽으로 올라가 2 폭포로 진입합시다, 했더니 한 번도 2 폭포까지 가본 적 없다며 앞장서세요, 한다.
나보다 한참 먼저 제주에 내려온 그녀인데 의외로 1폭포만 구경했다며 친구 덕에 새로운 폭포 알게 됐다며 반긴다.
실제 천지연 제2폭포가 그중 압권인 것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수량 가장 풍부하고 높이도 있어 낙차폭이 크다.
그런만치 하얀 실크 주단 허공에 걸쳐놓은 양 폭포 위용 아주 그럴싸하다.
3 폭포 가는 길목엔 곁가지 친 볼거리가 여럿이다.
친구가 오가는 차 안에서 볼 적마다 궁금했다는 높다란 선임교,
중국풍의 무작스레 큰 무지개다리는 여미지와 천제연을 이어주는, 이름하여 선녀가 임하는 다리라나.
서귀포 시내 정방폭포 입구에 선 서복전시관을 둘러본 뒤 차이나타운처럼 뭐야! 중국에 쎄쎄~아부하냐? 영 거슬리며 기분 떫었다.
그 느낌을 선임교에서도 받았기에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선임교.
맨 처음 한번 건너보고 노골적인 중국색이라서 천제연에 와도 그냥 무시하고 패스한 다리인데 중심부에 서면 한라산이 마주 보여 전망터로는 괜찮은 다리다.
친구는 다리 꼭대기에서 사방으로 사진 찍느라 한참 만에야 내려왔다.
그 다음 관심 간 곳은 국가 등록문화재 제156호인 천제연 관개수로다.
흘러 흘러 바다와 합류하는 하늘못인 천제연 물을 이용하여 논농사를 지으려 설계한 대정군수 채구석 어르신.
그는 1098년 폭포 옆 절벽을 타고 천연암반 지형을 끌로 쪼아 물길 내는 난공사 끝에 2킬로에 달하는 관개수로를 완성시켰다.
다공질 화산토인 제주라 논농사처가 없던 곳에 옥답 5만 평을 만들므로 백성들 먹고사는 기본을 해결해준
그런 관리가 정녕 기립다,
윗자리 차지하면 제 잇속 챙기기에 혈안인 시대인지라 더욱 돋보이는 대정군수 나으리다.
계곡 아래 깊이 난 3 폭포라 오르내리는 층계 수가 퍽 많은 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폭염경보에 35도 육박한 날씨라도 워낙 녹음 울울창창해 숲그늘로만 걸으니 더운 줄 몰랐는데 등짝에 땀이 줄줄 흐른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 중 눈에 띈 정경, 담팔수 몸체에 영양수액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추위에 약해 난대림에 사는 상록교목 천연기념물인데 어디가 아픈 거니?
가죽처럼 두터운 잎을 가진 나무라 혹서에 지친 걸까.
사람이나 식물이나 생명가진 뭐든 시난고난하면 보기 짠하고 안쓰럽다.
유마힐 거사가 문병 온 문수보살에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했듯이 중생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운 법.
중생은 누리의 모든 생명가진 존재를 이른다.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대로 일체중생은 모두가 한 몸인 것을.
그럼에도 깊은 숙고없이 발전 또는 개발이란 명분하에 쉽게 자연과 환경파괴 일삼는 세태.
드디어 우렁찬 폭포소리 들리더니 하얀 폭포 줄기가 드러난다.
소담스레 떨어지는 폭포소리는 숲 건너온 푸른 바람 더불어 청량하기 그지없다.
폭포수 입자가 음이온을 다량 선사해 폭포 앞에 이르니 심신 공히 상쾌해지며 날아갈 듯 시원해진다.
랩 춤동작처럼 요란스레 흔들어대는 잎새들, 설렁대며 몰아치는 바람 맞으려 허수아비 흉내내듯 두 팔은 벌린 채다.
작은 키에 아담 사이즈의 예쁜 폭포가 제3폭포.
제3폭포는 영국왕실의 막내 루이스왕자처럼 귀엽다.
근엄한 행사장에서도 어린아이답게 짓궂은 표정 짓던 모습이 떠올라 슬몃 싱긋거렸다.
여유롭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이 축복의 시간.
아예 여기 자리 잡고 앉아 우리는 정화된 주변공기 흠향하며 제대로 된 피서를 즐겼다.
다섯 시 넘어서 중문단지로 올라오니 한라산 백록담이 구름에 살짝 숨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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