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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5. 2024

대비되는 천제연 관개수로와 선임교

좌측 목책 옆으로 수로가 나 있으나 관광객 시선은 우측만
암벽을 정으로 쪼아서 낸 동굴 통한 물길
선대들이 남긴 관개수로 흔적을 기리는 성천답관개유적비

의식주 꼽지만 사람은 일단 먹어야 산다.


따지고 보면 '식'이 최상위 개념일 텐데 의외다.


체면 중시하는 민족다이 이왕이면 다홍치마요 옷이 날개라서 인지 옷치레가 앞장섰는데.


오죽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으랴.


물이 부족해 논농사를 짓기 어려운 자연환경 척박한 제주다.


비가 오긴 와도 물이 금세 빠져버리고 마는 다공질 화산토라서 물을 가둬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천제연 상단의 풍부한 물을 농업용수로 끌어오는 관개수로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폭포 인근을 찬찬히 살펴보니 암반 뚫어 베릿내오름 동쪽으로 수로를 내기만 하면 논농사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지금같이 토목 기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 백 년도 전인 세월에 대정 군수 채구석은 발상부터 엄청난 역사를 그렇게 펼쳤다.


중문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수로 통해 끌어들인 후 성천봉 앞의 논에 물을 대겠다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길이 1.9㎞, 너비 0.9m, 깊이 0.5m의 수로를 완성시키는 데 3년 세월이 소요됐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절벽에다, 흙도 아닌 암벽에다 수로를 만들자니 그럴 만도 했다. 

천제연폭포로부터 성천봉까지 이어진 2킬로에 달하는 수로를 천연암반 곡괭이로 깨고 정으로 쪼아 어렵사리 물길을 만들었다.

바다로 그냥 흘러가버리는 귀한 담수를 농지로 이끌어온 관개공사를 주도한 군수 외 이재하 이태옥 어른들 이름 기림은 마땅한 일이다.



1905년부터 1908년에 걸친 대역사로 불모지는 푸르른 옥토로 바뀌었다.

물경 5만 평에 이르는 땅이 그렇게 생명을 키우는 논으로 변모했다.

당시 관개수로 공사는 화약도 없이 바위에 굴을 뚫어야 했으며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통로를 내면서 물길 이어가는 난공사였다.

이 공사로 지금의 중문 관광단지인 중문마을은 이웃 고을인 강정과 함께 제주도 내 최대의 쌀 생산지가 되었다.

곤밥(쌀밥)을 얻기 위해 지역민들이 쏟아부은 눈물겨운 노고 덕에 이뤄진 기적 같은 성과였다.

천제연 상단 웃소의 물을 끌어 온 웃소 물길이 성공을 거두자 일제 강점기 때 천제연 중간인 알소의 물을 끌어들이는 2차 관개수로도 만들어졌다.

시공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적잖았을 테고 주민들의 크나큰 희생 역시 따랐을 터라 수로를 지켜보는 내내 숙연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가파르다 못해 아찔한 암벽이다.

아차 순간 발 헛디디면 수십 길 낭떠러지 절벽 아래 암석에 핏자국으로 스러지고 만다.

비 오면 무섭게 불어난 폭포수, 한순간에 그 모든 흔적들 무심히 지워버렸으리라.

선대들의 헌신적인 집념의 결집체인 관개 시설 덕에 일궈진 옥답은 이제 중문 관광단지에 포함되어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절벽에 남아있는 물길만은 그 가치 인정받아 뒤늦게나마 국가 등록문화재 제156호로 등재되었다니 다행이다.

다만 사시장철 관광객 모여드는 곳이니만치 이 물길 관리하는 시 수도국에선 수로의 낙엽 제거 등 청결유지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한편, 천제연 2 폭포와 3 폭포 사이에는 뜬금없이 선임교(仙臨僑)라는 거창한 석교가 가로질러 나있다.

하늘의 칠선녀가 옥피리 불며 내려와 임한 다리라는 뜻처럼 하늘과 잇닿기라도 하려는 걸까.

느닷없이 솟구친 아치형 다리도 생뚱맞은 데다 중국풍에 가까운 색채와 요란스러운 디자인조차 거슬렸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격으로, 하늘 연못에서 칠선녀가 목욕했다는 전설 끌어 붙여 꾸며놓은 호화판 돈잔치랄까.

다리 난간에 비천하는 선녀상 울긋불긋 조각해 놓아서인지 칠선녀 다리라고도 부른다는데, 흠!

이 다리를 처음 볼 당시는 제주를 야금야금 파먹으려 드는 중국 자본이 어른거렸다.


중국과 무관하게 만들었다 하자 두 번째로 드는 의문점.


서귀포 시에서 시공했는지 아니면 여미지식물원의 협찬에 의해서인지 그 점도 자못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천제연 폭포에서 자연스럽게 꽃길로 이어진 여미지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어진 구조라서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다리 건너 천제루라는 무작정 큰 누각도 대륙적인 면모라 찜찜했지만 올라가 보니 전망은 훌륭했다.

저 아래로 밀밀히 우거진 난대림 숲 믿음직스러웠으며 멀리 아스라한 서귀포 앞바다도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천제루 아래 턱없이 너른 광장, 병풍 펼치듯 양각해 놓은 칠선녀 조각은 보나 마나 뻔한 내용일 터라 대충 지나쳐버렸다.

그보다는 구석에 놓인, 손맷돌이라기엔 너무 커 연자방아에 가까운 석조물에 눈길 잠시 머물렀다.

관개수로 덕에 아랫마을 논농사 지어 명절 되면 곡식 절구질하거나 저런 맷돌에 갈아 떡도 빚고 찌짐도 꿉었을 터.

여타 석조 조경물보다 맷돌이라는 매개체가 그나마 선대가 남긴 천제연 관개수로와의 연결고리 노릇을  해주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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