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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5. 2024

하논에서 모내기 구경 삼매경

천제연폭포 관개수로를 보나따나 조선시대에는 화산섬이라도 제주에서 더러 쌀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벼가 자라는 모습을 도내 어디서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

화산섬의 특성상 논농사를 짓기 어려워 주로 밭농사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한편, 예외가 있으니  조밀하게 다져진 분화구 바닥인 데다 여기저기에서 용천수 샘솟는 하논에서는 여전히 논농사를 짓는다.


하논분화구는 특수 지형이라 물이 고이는 땅인 데다 용천수까지 대거 분포돼 비교적 물이 풍부한 지대라서다.


따라서 제주에서 유일하게 논이 있는 곳이다.

해서 여기선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논농사를 지어왔다.




지난 일요일, 서홍동 주민자치회에서 주관한 하논 생태체험 행사가 있었다.

그날 초등생들이 질퍽한 논에서 모내기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렬로 반듯하게 꽂아야 하는 모내기를 아이들이 어떻게 해놨을까?

줄 맞춰 모를 심게 해주는 못줄이 요즘에도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예전 중등학교 다닐 때 농번기 일손 돕기의 일환으로 모내기철에 농촌에 가서 모내기를 지원했다.

학생 외에 군인이나 공무원들도 너른 평야가 있는 마을에 가서 모심는 일손을 도왔다.

당시는 물속에 거머리가 흔해서 장화를 신거나 헌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논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을라치면 여학생들은 질겁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다.

요샌 과도하게 비료와 농약을 써서 거머리도 없어졌다고는 하나 지난번 모판 구경하다가 실로 수십 년 만에 거머리와 조우한 적이 있다.

징그러운 거머리조차 하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하논은 재작년부터 계절이 바뀔 적마다 수차례 들락거린 터라 철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른 봄엔 자운영꽃 만나보려고 몇 번 드나들었으며 지난달엔 개구리 소리를 들으려도 왔었다.

자운영은 논갈이하며 다 갈아 엎어져 흔적 없이 사라졌고 대신 이름 모를 작은 풀꽃만 깔려있었다.


개구리 소리는 해나 져야 들을 수 있을 테고.

개구리 뛰놀만한 늪에는 부들이며 갈대 같은 수초들만 무섭게 자라 내 키를 웃돌 정도였다.

하논 들판에서 갑자기 퉁퉁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옳커니! 이앙기 소리구나.

아직 한번도 모심는 작업 현장의 이앙기를 본 적 없는지라 논길 따라 들판 가운데로 나아갔다.

모판 늘어놓은 논두렁 흙이 물컹거려 새색시걸음으로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자칫하다간 신발이 진흙에 빠져 젖을 판이었으니까.


기계로 하는 모내기 구경이야말로 새롭고도 차진 구경거리.


신기하게도 척척 모를 심어가며 앞으로 달려가는 이앙기를 지켜보며 한참을 구경삼매에 빠져있었다.


처음 보는 이앙기를 운전하는 농부 아저씨, 모심는 사진 연방 찍어대는 내가 참 하릴없는 사람이다 여겼으리라.




한 열흘쯤 물에 담가 싹 틔운 볍씨를 뿌려 모를 알맞게 키워낸 못자리판이며 직사각형의 모판이며 요모조모 사진에 담았다.

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쪄내 적당 포기씩 똑 고른 간격으로 무논에다 뿌리 튼튼하게 꽂아주는 모내기.

모심는 논에는 한 줄로 늘어선 여남은 명 일꾼들이 선창자 가락에 맞춰 노동요 구성지게 불렀었는데.

하얀 광목 바지 둥둥 걷어 올리고 허리춤에는 수건 하나 걸친 다음 등줄기 좌악 편채 후렴구 뽑아댔는데.

"~~ 오뉴 월에 흘린 땀이 / 구시 월엔 열매 되네~~~~ "

노래 부르며 일일이 손으로 던 그 작업을 이제는 농부 혼자서 이앙기라는 기계가 도맡아 대신해 준다.

그러나 사람 손길만큼 고르지 않아 삐뚤빼뚤 심은 모양새 제멋대로였다.


이앙기만 한참 따라다녔더니 휘발유 냄새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마침 실참때인 듯 기계 소리 멎게 한 뒤 이앙기 농부는 논두렁 풀밭에 앉아 비닐에 든 빵 봉지를 뜯었다.

여기 곁들여지는 건 우유와 수박 쪽.


수박을 권했으나, 어서 맛있게 드시라며 얼른 자리를 비켜줬다.

예전 같으면 베 보자기 덮개 아래 광주리 가득 이고 왔을 새참 음식.

고봉밥에다 미역냉국에 가지 무침이나 애호박볶음, 하다못해 갈치 꽁다리 놋노릇 구워 왔을 텐데.

당연히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노란 양은그릇도 딸려왔을 테고.




개구리 소리 들어보러 해질녘에 다시 와보기로 하고 논둑길을 벗어나 돌아오는 길.


유월 들녘은 왕성한 에너지 가득 차 한껏  짙푸르렀고 칡덩굴 길가까지 무성하게 뻗었다.


마을길에서 만난 농가 옥수숫대 실했으며 농약 허옇게 묻은 귤밭의 귤은 그새 탱자만큼 굵어졌다.

농가 담 앞에 무궁화 피고 뜨락에는 도라지꽃  봉선화 코스모스 꽃 피어난 걸 보니 이제 그럭저럭 시절은 초여름으로 접어들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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