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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5. 2024

귀 얇은 탓에

추적대는 비를 맞으며 달래를 캤다.

우비를 입었지만 바람이 심해 모자가 자꾸 벗겨졌다.

바지 아랫단은 제법 젖었고 등산화도 축축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도시 어이가 없었다.

바보같이 추적대는 우중에 이 무슨 청승?

한라산 자락 초지에서 쭈그린 채 달래를 캐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서 이리왈 저리왈 시키는 대로 상대방에 지배당하는,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라도 그 비슷한 경우다.

한 고집하는 자신이지만 때론 어처구니없이 귀가 얇아 이런 우를 범한다.

일면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었던가.

요일 자 서울 가는 항공권을 예악해놨다.

언니네 가서 함께 선영도 둘러보고 대호지 외숙 내외분 유택도 참배할 참이었다.

다음 주 초에 서울 올라간다니까 언니는 대뜸 쑥개떡과 제주도 달래가 먹고자프다 한다.

은근스레, 해풍 맞고 자란 쑥이 좋다고도 하고 곱창김 살짝 불김 쐬서 달래장 곁들여 먹으면 최고라며 입맛 다신다.

이건 꼭 갖고 오라는 겁박이나 명령보다 더 거부할 수 없는 호소력으로 작용한다.

자승자박, 결국 쑥떡은 물론 목장길 걷다 본 달래 얘기를 진작에 신나게 떠벌인 바 있으니.




며칠 전 언니와 통화하며, 뉴저지에서 교민 친구가 온다기에 향수 어린 입맛 다셔보게 하려고 쑥 뜯으러 가는 중이라 했다.


 말 듣자마자 언니가 대뜸 쑥떡 먹고 싶다고 했으니 쑥개떡은 준비할 생각이었지만 달래는 뜻밖이다.

벚꽃 필 무렵 캐온 달래는 먼 데서 벗 오면 그녀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해주려고 냉동실에 넣어뒀다.

그걸 덜어갖고 갈까 했더니 생달래라야 달래 간장을 만든다며 퇴짜를 놨다.

어쩌겠는가.


꽝꽝 얼어붙은 한겨울에 잉어찜 타령하는 것도 아닌데 쪼르르 버스 타면 구할 수 있는 달래야 응당 캐러 갈밖에.

동기간 우애 유별나서가 아니고 그 누군들 이런 말 듣고도 못 들은 척 묵살하랴.

이미 마늘처럼 쫑까지 나온 터라 잎이 제법 센 달래이긴 하지만 주섬주섬 달래를 캐면서 건너편 목장 말들도 구경했다.


멀리 한라산 윤곽을 배경으로 한 마방 초지는 이날따라 더 평화로웠다.


마침 빗발 더 거세져 뿌옇게 흐려진 시야.

목표했던 분량이 대충 채워졌기에 그쯤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목장 너른 초지에 떠듬떠듬 몇 마리 말은 세찬 비 전혀 아랑곳 않은 채 풀을 뜯느라  고개 숙이고 있었다.


숲과 바로 이어진 언덕에서 말이 아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포착돼 자세히 보니 사슴 무리였다.


우리 안까지 단체로 몰려와 우중나들이를 즐기고 있는 사슴가족.

폴짝폴짝 뛰노는 그들을 주시하며 목장 철책 따라서 걸었다.

강풍 아랑곳 않고 빗속에서 그렇게 만난 사슴들 재롱은 먼 빛일 망정 한참 지켜보게 만들었다.

그레 미소 머금게 하는 뜻밖의 특별 선물.


언니 덕에 제주목장에서 뛰노는 사슴 무리와 조우할 수 있었기에 이도 감사 목록에 추가시켰다.

우비 위를 부드러이 터치하는 빗소리가 문득 The Cascades의 Rhythm of the Rain처럼 스며들었다.


우중에 한라산 자락 산책하는 묘미 미상불 나쁘지 않았으니 언니에게도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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