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국제 윈터뮤직페스티벌
산지에서 내려오는 눈바람 맵싸한 저녁 일곱 시.
추운 밤 외출이 약간은 망설여졌으나 시간 맞춰 예술의 전당 대극장 앞에 당도했다.
서귀포 국제윈터뮤직페스티벌, 아직 1월이니 신춘음악회는 너무 서둔 감이 들 터.
새해 들어 첫 공연이므로 예술의 전당 측에서도 나름 공을 들인 기획일 게다.
게다가 인터내셔널이 붙은 걸로 미루어 해외 연주자도 초빙한 공연이다.
그러나 제주섬 지방도시에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카탈로그에 나온 뮤지션 프로필을 훑어보니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각 분야마다 한예종이나 쥴리어드, 브뤼셀 왕립음악원 출신이 포진하고 있었다.
차이콮스키 국제 콩코르며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와 마리아 카날스 국제 콩코르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인 연주자가 서귀포를 찾은 날.
들뜬 기대감과 달리 레퍼토리 선정부터 어딘지 미흡한 감이 들었다.
피아노 독주로 시작된 공연은 이후 시종 바이올린이 도맡았는데 갈수록 연주는 늘어난 악기의 현처럼 느슨하고 허술해 점차 몰입도 낮아졌다.
식상할 정도로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오펜바흐의 자크린의 눈물, 비발디의 겨울,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까지.
예술성과 대중성이 조화 이루는 콘텐츠로 시민들의 문화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공연이라서일까.
ROOT '뿌리’라는 주제에 맞춰 클래식의 근원과 깊이를 느낄 수 있게 꾸민 무대라고 했다.
그러나 세계 정상 클래식 공연을 통해 수준 높은 공연 관람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서귀포시 예술 관계자의 야심 찬 포부에 부응하지 못한 음악회였다.
독주가 아니라서일까.
참신함이 없는 틀에 박힌 구태의연함에다가 무표정으로 일관해 연주자가 AI 기계처럼 느껴졌다.
연주에 심취해 몰아의 경지에 잠기거나 뜨거운 열정 활활 타올라 객석과 교감 나누며 절대공감 이끌어내지 못하는 타성에 젖은 진부한 연주 태도는 집중도를 감하게 했다.
졸음이 올 듯 자못 심드렁해진 상태인 그때 홀연히 객석을 깨어나게 한 선율이 뇌를 각성시켰으니.
은쟁반 위에 올린 커팅 잘 된 크리스털이 내는 투명한 음향 같달까.
앙상블 퍼플의 음악은 기교를 앞세우지 않는 서정성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연주가 끝난 뒤에 남는 것은 흥분이 아니라 잔잔한 파문, 물결이 지나간 뒤 수면 아래로 신비로이 잦아드는 사라짐일까.
타악기 연주자와 플루트 연주자가 함께 콜라보로 연주하는 고아한 무대를 처음 접하자마자 단숨에 빠져들고 말았다.
앙상블 퍼플 뮤지션들은 음이 생겨나 마음 고즈넉이 어루만지다가 서서히 사라지도록 가만히 받쳐줄 따름이었다.
앙상블(Ensemble)은 '함께' 하면서 '전체적 조화'를 이룸을 의미한다.
퍼플은 타악기를 총칭하는 퍼커션(Percussion) + 플루트(Flute)가 합쳐진 조어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줘 조화 이룬 플루트와 실로폰 각 악기는 주인공 되려 하지 않고 누군가 앞서면 다른 누군가는 물러선다.
모두가 나서길 좋아하는 세상에, 마치 꽃꽂이에서 안개꽃처럼 나지막하게.
이 균형은 '함께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려는 원칙으로, 이윽고 적절하게 자리한 쉼표와 마침표가 따라온다.
앙상블 퍼플의 연주는 소리의 밀도가 다르다.
음으로 가득 채우기보다 음과 음 사이 공간을 남겨 둔다.
그 여백이야말로 하나하나의 음마다 신비로이 깨어나 서로 조응하게 해 준다.
미묘한 떨림들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플루트와 실로폰 선율에 실려 듣는 재즈와 탱고라니.
탱고는 관능이 아니라 긴장으로, 재즈는 스윙이 아니라 자유로운 곡선으로 다가온다.
흔히 탱고라 하면 붉은 조명과 깊은 밀착을 떠올리게 한다.
탱고의 긴장감은 욕망의 다른 얼굴이다.
음과 음 사이에 남겨진 조용하나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탱고의 본질과 닮아 있으나, 그러나 다르다.
다가가려는 충동을 끝내 붙잡아 두는 자제력과 넘어서지 않으려는 절제력이 만들어내는 떨림이 공존하는 자리.
플루트는 그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긋고, 실로폰은 그 얼음장 위를 가비얍게 건넌다.
그래서 관능의 유혹은 사라지고, 대신 균형 잡힌 품격이 아로새겨진다.
재즈 역시 마찬가지다.
스윙은 박자에 몸을 맡기는 쾌감이지만, 음은 규칙을 존중하되 걸림 없는 자유 그 자체를 선보인다.
재즈의 스윙, 흔들다(Swing)는 본 의미대로 몸을 흔들어대는 전형적인 리듬감이나 속된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려낸 진정 자유로운 영혼의 나부낌이다.
공연 내내, 자유는 넘침이 아니라 절제 속에서 빛났다.
퍼커션과 플루트의 투명한 편성은 음악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걷어냈다.
남은 것은 은쟁반 위의 크리스털처럼 투명히 맑은 고요로움이다.
음악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의식에서 맴도는 한 생각.
식상하게 하는 진부한 글 말고 이와 같이 잔잔히 영혼 맑히는 글 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