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와 꽃보라의 대비

사려니 눈길과 위미리 꽃길

by 무량화


귀포 하늘은 매우 쾌청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안전문자가 떴다.

대설로 인해 1100로 교통통제. 노선버스와 한라눈꽃버스가 평화로 방향으로 우회 중이란다.

516도로는 언급되지 않는 걸로 미루어 그쪽 길은 차량 통행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한라생태숲 바람꽃 눈색이꽃 하마 피었을까, 소식 궁금해 생태숲을 찾기로 했다.

토평동 입석동을 지날 때만 해도 동천 푸르고 흰구름

여유로웠다.

도로변에 선 매화 가지에는 희끗희끗 마치 보푸라기 일듯 제철 맞은 설중매 피어있었다.

한라산록 서쪽 상황과 달리 한라산 둘레길 입구는 대설은커녕 백설 흔적조차 없었다.

성판악을 향해 달리는 차창가로 눈발 성글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산자락에는 엷게 눈도 쌓여 있었다.

하차하는 이도, 오르는 이도 없는 한산한 성판악을 지나쳐 차는 점점 산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뿌옇게 눈보라에 파묻힌 숲, 눈은 차츰 세를 불려 가며 극성스레 흩날렸다.



모든 풍경이 아슴푸레해졌다.

동시에 의식 선명해지면서 계산으로 머리 분다워졌다.

잘 판단해서 그에 따른 선택은 빠를수록 좋겠다.

이대로라면 생태숲까지 가봤댔자 다.

제주시 쪽이라 기온 내려가면서 눈은 더 심해질 터.

자칫하다간 대설인지 폭설에 속수무책 갇힐 수도 있겠다.

교래입구에서 내려 비자림로에 있는 사려니숲길로 들어가 잠깐 걷다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하차벨을 누르고 창밖을 내다보니 눈보라 어지러웠다.

주춤거림 없이 몰아치는 눈바람 속으로 내려섰다.

눈은 푸덕지게 그리고 기세 좋게 내렸다.

그렇다고 펑펑 탐스러이 쏟아지는 함박눈은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후드끼며 허공에서 미친듯 춤추며 고래질 치는 싸락눈.

눈발은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니라 가로로 눕다시피 사선으로만 흩날렸다.

당연히 혼자일 거라 여기고 걷는데 놀랍게도 여학생이 뒤를 따랐다.

사려니 입구에 멈춰 서서 그녀에게 홀로 왔냐고,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을 보냈다.

서울에서 천백고지 가려고 왔는데 천백도로가 통제되는 바람에 꿩 대신 닭, 차선책으로 택한 겨울 사려니숲.

하늘과 바람이 오늘은 천백고지에 들일 수 없다고 고개를 저은 덕분에 우리는 사려니숲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통제는 거절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도록 이끈 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꿩 대신 닭이라 했지만, 겨울 사려니숲은 닭으로 부르기엔 넘치게 웅숭깊었다.

신성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사려니숲, 오늘은 이름대로 사려 깊은 숲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눈으로 자욱한 숲은 의외로 포근했다.



눈 쌓인 길에 서너 명쯤 앞서 간 발자국이 찍혀있었지만 혼자라면 영 휘휘할 뻔했는데 감사하게도 서로에게 귀한 인연이 된 우리다.

그런 심경 진솔하게 나누며 눈발 자욱한 숲길을 걸었다.

대학원생이라는 그녀는 예쁜 이름처럼 피부 맑고 눈도 예뻤다.

우리는 정스런 조손 사이이듯 도란거리면서 사진도 찍어주며 눈보라 휘몰아치는 눈밭을 걸어 나갔다.

굴참나무 산딸나무 서어나무 소나무 편백나무 삼나무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 코스를 두어 번 걸어본지라 앞장서며 기상상태 고려해 멀리까지 가지 말고 '사려니숲' 시비가 서있는 데에서 리턴하자고 했다.

여긴 10킬로에 달하는 트레킹 코스로, 도중에 샛길도 없어 세 시간여 좋이 소요되는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며 동의해 우리는 고즈넉이 펼쳐진 겨울 풍경에 감탄하고 숲을 치달리는 눈보라에 탄성 보내며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겨울숲을 엔조이했다.

그만큼 겨울 숲은 말없이 고요해서 더 많은 것을 여운으로 남기는지도.



눈발 푸짐하게 쏟아지던 한라산을 내려와 서귀포에 이르니 완전 딴 세상이다.

립 밴 윙클처럼 꿈을 꿨던가, 좀전의 눈발 성성하던 한라숲이 꿈만 같다.

별유천지 여기가 바로 도원경, 무릉도원 유토피아가 따로 있더냐.

쪽빛 하늘에 눈부신 태양, 오후녘이라도 바람결 온화하니 순했다.

어중간한 시각, 그냥 귀가하기 아까워 같은 차를 탄 그녀에게 별도의 계획이 없으면 낙화 보러 동백원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반색을 했다.

여유로이 자연을 즐기는 여행 스타일인 그녀와 볼고롱 동백으로 갔다.

카멜리아 힐을 아는 그녀라 굳이 각 잡고 폼 잡은 동백수목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우린 단지 동백 꽃잎의 낙화 정경을 보고자 했으니까.

며칠 전에 왔을 때보다 떨어져 쌓인 꽃잎이 풍성해 더 볼만했다.

바람이 휙 몰아칠적마다 흙먼지가 일며 동시에 동백꽃 이파리 꽃비되어 휘날렸다.

난분분 난분분....하르르 하르르....

동백원 입장 시 표를 먼저 구매했더니 그녀가 굳이 차를 사겠다고 해 카페에 들어갔다.

동백원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앉아 난 따끈한 진저레몬티를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조손 간으로 여긴 쥔장이 자청해서 프레임 안에 든 배경 근사하다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늦은 오후 광선이 좋아 동백꽃이 그 어느 때보다 화사했다.

밝은 빛 아래서 이윽히 건너다보니 어려움 없이 곱게 자란 티 역력한, 고유의 투명스런 분위기가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반면 세파에 휘둘린 곤고한 표정의, 팔십 향해 달리는 내가 사진을 버려 놓은 건 아닌가 잠깐 주춤.

하지만 그런데 구애받을 위인인가.

곧바로 까지 온 김에 동백군락지에 들러서 토종동백 진면목도 만나보고 동박새 소리도 들어보고.

아마도 전생에 난 훈장이나 해설사였지 싶다.

노을 보러 외돌개 가려고 서둘러 차에 올랐으나 자꾸만 구름층 무거이 쌓이며 해가 그만 숨어버리는 바람에 일몰 감상은 불발.

외출하기 전 덤벙대다가 장갑을 놔두고 온 내게 그녀는 작별에 앞서 자기가 끼던 장갑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장갑 낀 채 사진 찍을 수 있으니 손 안 시려울 거라면서.

내일 일찍 상경하므로 필요 없다며 마치 정표 남기듯.

신시가지에 거처를 둔 그녀는 차창 너머에서 애기같이 희고 작은 손을 가만히 흔들어주었다.



*거처에 돌아와 폰을 열어보니 우리가 오르내린 516도로도 대소형 차량 모두 교통통제가 됐다.